(질문) 네가 꿈꾸는 한 방은 뭐니?
천재들의 차이점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들이다. 한 사람은 물리학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은 화가로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통해 이전까지 갖고 있던 과학관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스페인 출신의 프랑스 화가인 피카소는 2차원의 평면을 넘어 3차원의 세계를 화폭에 담는 입체주의 기풍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아인슈타인은 젊은 시절 논문 몇 편으로 한 방에 일약 스타의 반열에 도달했고, 피카소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통섭적인 인생의 권유』에서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방식과 피카소 방식이지요. 두 사람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결정적 한 방으로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반면,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을 통해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아인슈타인처럼 살래? 피카소처럼 살래?”
“아인슈타인이요”
“왜?”
“피카소는 고단한 삶이었다고 알아요.”
“그러면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은 대체로 평온해 보여요. 저는 힘들게 살고 싶진 않아요”
‘고단, 평온’ 중3 아들 입에서 나올 단어들은 아닌 듯한데, 사춘기라 생각이 많나 보다. 아들의 말처럼, 우리는 대부분 아인슈타인의 삶을 동경한다. 어렵고 힘겨운 삶보다 평온과 안락한 삶을 살고 싶다. 매번 한 방을 머릿속에 그린다. 로또도, 책도, 관계도, 한 번 제대로 풀리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될 거란 환상에 살고 있다. 지나온 내 삶을 되돌아보면 아인슈타인이기보다 피카소처럼 다양한 시도(그림, 조각, 판화 등 작품만 약 3만여 점)를 해야 했는데, 매번 한 방만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 같다. 왜? 한 방만을 노리고 있었을까?
아마도 답답한 현실 도피의 장으로 여겼던 것 같다. 미래의 불확실과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펼치지 못했다. 꿈은 있었으나 현실의 높은 벽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벽을 뛰어넘을 용기도 없었고, 차근차근 계단 오르듯 밟아 갈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자극하는 한 방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로또로 한순간에 인생 역전하는 사람들과 부모의 재산 상속으로 건물주가 되면서 삶에 여유를 찾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보며 한 번에 역전하고 싶은 욕심을 마음에 담았다. 하지만 이 욕심은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 꿈이 아니라 과욕이고 즐거움이 아니라 낙심의 깊은 골짜기로 인도한다. 이는 이상을 꿈꾸는 삶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핑곗거리만 찾게 한다. ‘나에겐 부모가 상속해 줄 게 없어서 그래. 똑똑한 머리를 갖고 태어나지 못해서 그래.’
핑계를 찾기보다 내 안에 감춰진 용기를 찾아야 한다. 피카소처럼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하려면 그만한 용기가 필요하다. 천재적인 머리가 없다면 꾸준한 도전이 필요하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교훈도 배우지만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그 경험이 다시 도전할 용기를 준다. 피카소처럼 다양한 시도를 하며 사는 삶은 아들 말대로 너무 고단하다. 아인슈타인 vs 피카소, 그들이 롤 모델이 될 수는 있다. 누구처럼 살래? 라는 질문에 생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맞게 살아왔듯, 우리에게 맞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들처럼 사는 삶에는 자유함이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어떻게 살래?”
양쪽을 두고 선택하지 않아서 좋다. 하지만 애매한 질문이고 철학적인 질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인류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이다. 여기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누군가의 잣대에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기에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음 가는 대로가 말처럼 쉽지 않다. 막중한 책임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결정에 대한 책임, 결정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고민거리들. 그 고민을 만나는 것이 삶이고 그들과 익숙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넘어서야 할 것은 넘어서고 남겨 놓아야 할 것은 남겨 놓는다.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다. 모든 문제를 풀 수도 없다. 어떻게 사는가는 그런 문제와 숙제를 안고서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짧은 순간만을 바라보며 산다면, 고민만 하다 죽는다. 인생 길게 봐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 질문이 하나 더해진다.
“어떻게 즐길래?”
놀이가 아주 중요한 시대이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말에 힘이 실린다. 그들을 들여다보면 강한 열정이 있다. 놀이가 일로 일이 놀이로 자연스럽게 트랜스포머처럼 변화되는 시대이다. 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4차 산업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결합하는 융합의 시대이다. 놀고 일하는 것도 융합이 필요하다. 자동차가 로봇이 되어 인류를 구하는 것처럼 놀며 즐기는 열정으로 일과 결합한다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것이다. 세상에 없는 상품과 기술이 아니라 주변에 있지만 찾지 못하는 것을 찾는 힘은 다양한 결합에 의한 다른 시각에서 나온다. 그 시각은 놀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놀이가 힘이 되는 시대이다. 유시민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말한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기쁜 삶을 찾아 나가자.”
나는 놀 때, 즐길 때 가장 큰 에너지를 쏟아낸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즐길 것이냐? 어떻게 놀 것이냐? 가 인생의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매일 일로 얼굴 붉히며 부딪히는 삶이 아니라 놀이로 부딪히기를 바란다. 일터에서 놀기, 일하면서 놀기, 회의하면서 놀기. 놀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단지 놀 줄 몰라서 문제다. 30년 넘게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퇴직하신 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놀이라고 한다. 퇴직하고 가족과 어울리려면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즐길 줄 모른다. 가족, 회사라는 쳇바퀴 안에서 일이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었다. 그 동력을 잃고 나니 한 몸처럼 지내던 가족조차 부담스러워진다. 아이들이 힘겨워하고 아내가 부담스럽다며 밀쳐낸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내가 헛살았구나? 라며 자조하다 보면 나란 존재는 사라지고 다른 누군가를 찾게 된다.
아인슈타인 or 피카소처럼이 아니라, 나처럼이라는 말로 귀결하고 싶다. 누구처럼 사는 삶은 재미없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지 고민하며 사는 삶이 힘 나고 재미있는 삶이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에게 만족하면 그뿐이다. 그것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