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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Dec 08. 2022

용기가 필요해

그때 내가 그랬어

엄마는 화장품을 방문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샀는데 그날이 되면 나는 괜히 신났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날이 예뻐지는 화장품 케이스를 보는 것도 좋았고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거나 손등에 살짝 발라보는 것도 보기 좋았다. 나는 엄마가 화장품을 고르는 내내 옆에 있었다. 엄마가 색조화장을 하는 날은 교회 갈 때뿐이어서였나 빨간색 립스틱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엄마가 빨간 립스틱을 골랐다. 색이 고왔다. 엄마는 화장대 위에 고이 립스틱을 올려놓았다.


어느 날 집에 나 혼자 있었다. 엄마의 화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새 립스틱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아랫부분을 둥글게 둥글게 돌려서 립스틱을 끝까지 꺼냈다. 맨 위쪽이 동그스름하고 뾰족하게 솟은 예쁜 빨간 막대. 사탕처럼 달콤해 보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웃는 모양을 하고 입술에 발라보았다. 빨간색이 입술을 덮기도 전에 립스틱은 뚝 부러졌다! 


급하게 구겨 넣어 뚜껑을 덮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등짝에 땀이 났다. 그리고 그냥 도망갔다. 며칠이 지나고 엄마가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옆에 내가 있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립스틱이 처참하게 부러져서 꾸깃꾸깃 들어있는 것을 본 엄마는, 나에게 묻지도 않았다. 동생을 큰 소리로 불렀다. 엄마의 부름에 해맑게 다가온 영희에게 엄마는 '이거 니가 그랬니?'물었다. 당황한 영희는 당연히 아니라고 했다. 엄마의 화장품에 손을 대는 사람은 너뿐이라며 엄마는 영희를 다그치다 등짝을 후려쳤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엄마의 매질에 영희는 자기가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어렸던 동생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 소리에 더 화가 나시고 말았다. 거짓말을 했다며 회초리를 찾아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나에게 화살이 넘어오지 않아서 안도했었던 것 같다. 나쁜 언니.


꽁꽁 숨겨 놓았던 이야기가 아이들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이 나고 말았다. 그 기억을 다시 덮을까도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서 동생에게 그때 립스틱 사건이 기억나냐며 사실은 내가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좀 웃으며 이야기한 것 같다. 아주아주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동생도 웃으며 나, 그때 억울했었어 언니! 하고 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생은 아주 분노했다. 그때의 억울한 매질이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언니가 기억났을 것이다. 잊었던 억울함이 몰려와 언니를 원망했다. 


내 잘못을 말는 용기와 그 잘못을 용서 해주는 용기.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용기가 더 클 것이다. 옹졸한 나 같은 성격이 내 잘못을 말한다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지만 자신이 덮어쓴 일에 대한 범인이 나섰을 때의 황망함을 이길 수는 없다.

재판관이 있어야 재심이라도 걸어볼 텐데 엄마는 우리 옆에 없으니까....

시간을 놓치지 말고 용서를 빌 것과 용서를 할 것을 용기 내어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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