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다. 취업 준비를 하다 보면 각 회사별 전형 날짜가 겹칠 때가 있다. 인적성 시험이나 면접 일정이 겹치면, 기껏 통과 해온 전형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주변에 그런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다. 나는 인적성 시험 한 번 말고는 겹치는 전형이 없었고, 다음 전형 절차까지 적당한 텀이 있어서 아다리가 잘 맞았다. 가장 다행이었던 건, 삼성전자 최종면접 결과를 듣기 전에, 다른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두 회사의 면접 기회가 주어졌는데, 만약 삼성전자 탈락 결과를 다른 회사 면접 전에 접했다면, 이번 시즌도 결국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더 초조했을 것이다. 면접은 심리전이기 때문에 이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다른 회사의 면접 때도, 자기소개 때 항상 어필해왔던 마라톤을 면접관님도 오래 하고 계셨다. 심지어 하프 마라톤으로 참가했던 서울 달리기 대회에도 같이 참가했었다. 전공이나 학교 생활 질문에는 미리 연습해둔 대답 중 하나를 꺼내서 얘기해야 하지만, 공감대가 형성된 마라톤을 주제로 이야기하니 내 대답도 자연스러웠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었고 좀 더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이 좋았다. 합격을 좌우하는 열쇠는 능력보다는 운이다. 지금 우리 세대의 취준생들은 그 어느 시절보다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누구 하나 모자라지 않게 준비되어 있다. 다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기회가 주어 지는지, 면접관은 어떻게 배정이 되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찬스가 주어졌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변수이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자책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할 만큼 했다.
최종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고통의 기간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너무 행복했다. 그 기분을 만끽하느라 글을 쓸 겨를도 없었고 쓰고 싶은 의지도 사라졌다. 그동안의 글은 대부분 갈등과 절망, 바람 속에서 써왔다. 절박함, 아쉬움, 억울함 등의 네거티브한 감정들이 글의 동기가 되었고, 그 감정에 몰입하여 글을 썼다. 합격 이후로 글이 없다는 건, 감정에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없고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노트를 꺼내어 펜을 들었다. 이 합격은 내 능력으로 얻어낸 게 아니라 재수가 좋아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나의 진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잊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을 아직 얻어내지 못했고, 더 쉽게 주어진 것을 좇아 왔다. 그것은 달콤하고 전 보다 덜 절박할 것이며, 불안은 나를 채찍질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기 하나를 잃은 것이다. 불안.
나는 겁쟁이처럼 그것을 피해온 것이며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하고, '불안'이 그랬던 것만큼 강력한 의지로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남들보다 느리고 가야 할 길도 멀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이 길 끝에 있는 것을 응시하자. 한 눈이 팔리거나 눈이 감길 때면, 지금 이 기록을 들쳐보자. 멀리 돌아가고 있지만 이 길 위에서 보이는 것들을 기록할 것이며,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새로운 길,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