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방송사에 지원한 서류전형은 모두 떨어졌다. MBC 작문 시험은 작년에 비해 만족스럽게 쓴 것 같은데, 내 글을 읽어보기나 했을까. 김신완 PD님 조언대로 눈 딱 감고 열심히 썼는데 왜 못 알아봐 주는 걸까. 언론고시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자만이었나. 이렇게 벽에 부딪힐 때면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 '너 PD 될 자격이 없는 거 아니야?'
실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중, 삼성전자 GSAT 결과가 나왔다. 합격이었다. PD가 되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기분 좋아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삼성전자에 지원을 한 것부터가 몸을 사린 거다.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용감한 녀석이 아닌 건 여러 글을 통해서도 증명이 되었다.
5월 2일 천안에 있는 삼성전자 TP센터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나흘 정도 열심히 준비를 하고 전날 서울역에서 16시 35분 기차를 타고 17시 20분에 천안아산역에 도착했다. 면접 전 날이라 압박감은 극에 달했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구체적인 동선까지 미리 짜서 그대로 실행했다. 당일 모여야 하는 5번 플랫폼을 찾아서 어느 쪽으로 나와야 하는지까지 확인하고 숙소가 있는 쌍용역으로 향했다.
모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생각보다 방이 아늑하고 시설도 나쁘지 않다. 6시가 조금 넘었다. TV를 조금 보다 면접 준비 자료를 다시 봤다. 그런데 창 밖의 기차소리가 자꾸 거슬린다. 창문을 열어보니 가까운 곳에 기찻길이 있었고 생각지 못한 변수에 당황했지만, 로비로 내려가 복도 반대편 방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8시 반쯤, 미리 알아봐 둔 사우나에 가기 위해 모텔을 나왔다. 이렇게 외딴곳에 혼자 묵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재작년 겨울, 혼자 국토 종주를 하다가 낙동강 근처 적교장이라는 모텔에서 하루를 보냈던 순간이 생각났다. 휑한 강변에 떡하니 서있던 그곳의 쓸쓸함이 떠올랐지만, 면접의 압박감은 그 쓸쓸함마저도 뭉게 버렸다.
면접 보기 전엔 항상 사우나를 간다. 건식 사우나와 냉탕을 오가며 땀을 빼고 식혔다. 땀을 빼면 노폐물도 빠지면서 피부도 좀 밝아지고, 생각의 노폐물이라고 할까, 쓸모없는 생각들도 빠져나가는 것 같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정신도 번쩍 들고 개운하다. 잠은 역시나 푹 자지 못했다. 잠이 들긴 한 건지도 모르겠다. 면접 당일엔 비가 왔고 택시를 잡아 천안아산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택시를 잡지 못한 손님 한 명을 같이 태웠다. 그 친구도 나와 함께 면접장을 향하고 있었다.
창의성 면접은 SNS에 관한 문제였다. SNS를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재고할 수 있는 중장기적 상품을 기획해보라는 문제였다. 나는 소비자의 니즈에 맞는 상품이 아닌, 소비자의 니즈를 생성하는 상품을 통해 고객 충성도를 높여야 한다고 했고, 인스타그램, 나이키 러닝, 애플 등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면접관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창의적인 발상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셔서 주로 책을 읽는다고 했다. 직접 살아보지 못한 여러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사건들을 마주하면 새로운 생각과 관점이 생긴다고 말씀드렸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으로 17세기 나치주의에 저항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 라는 책을 말씀드렸다. 솔직히 말씀드리긴 했는데 만족스러운 답변인지 모르겠다.
직무 면접은 반응이 좋았다. 문제를 풀 때부터 판서를 어떻게 할지 용지에 정리해가며 풀었다. 면접장에선 먼저 판서부터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약 7분 정도 판서 후에 차례대로 설명을 드렸더니 깔끔히 정리를 잘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추가로 자기소개서 기반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마무리했다.
가장 중요한 인성 면접, 아쉬움이 제일 많이 남는다. 면접관이 반갑게 맞아주시긴 했는데 그 모습이 더 나를 긴장시켰다. 1분 자기소개도 뒷부분을 좀 빼먹었다. 이 1분 자기소개의 꼬리 질문으로 마라톤은 언제 얼마나 뛰었는지, 대회 참가 여부나 기록 같은 것을 여쭈셨다. 결정적으로 내 멘탈을 와르르 무너트린 질문,
"태어나서 가장 후회해 본 경험을 말해 보세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있지 않나요?"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쪼그라든 마음엔 순발력을 찾아볼 수 없었고, 당황스러워서 할 말이 없다고 해버렸다. 면접관님께서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지 않았겠냐, 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바보 자식, 후회를 하지 않고 산 게 이 면접에서 떨어진 가장 큰 요인이었다. 물론, 나는 취준생이니 이 위기를 잘 모면해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다고 뭐,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상황에 아주 말려버렸다. 면접관님이 듣고 싶은 건 후회를 극복한 경험담인데. 그게 다소 작위적일지라도 말이다.
최악이다. 그 후로 어려운 질문만 계속하셨고 나는 면접관님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헛소리만 하다가 나온 것 같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이게 후회구나. 후회된다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우울하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면접이 끝나고 난 뒤에도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큰 후회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항상 후회하지 않으며 살려고 노력했고 그 나날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입니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좋은 선택이든 나쁜 선택이든 그것을 후회하지 않게, 오히려 더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문학청년의 삶이고 취준진담의 취지이다. 선택은 하나의 씨앗일 뿐이고 나는 그것을 꽃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도 그 선택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 좋은 선택을 하고도 자만의 길로 빠질 수 있고, 나쁜 선택을 해도 반성하며 재기할 수 있다. 그렇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낸다면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전혀 다른 꽃을, 향기를, 경험을, 사람을, 선택을 그리워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다. 왜냐면 내가 선택한 것들만이 줄 수 있는 결과들이 있고 그것들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서울대를 갈 수도 있겠지, 근데 더더욱 열심히 했으면 하버드 대학교도 갈 수 있는 거잖아. 후회에는 끝이 없다. 만약 서울대를 갔다면 여기서 함께 취업 준비를 한 소중한 친구들도 못 만났을 것이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통해 다른 만남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따지면 고등학교 시절 추억도 달라졌을 것이고, 부모님과 함께 해온 소중한 시간들도 달라졌을 것이고, 나란 사람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낸 내가 나인가? 나라는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선택으로 인해 바뀐 인생은,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호기심은 생길 수 있다. 과거의 한 선택이 나비효과처럼 내 인생을 어떤 식으로 바꿔버릴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의 선택과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그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애지중지해온 지금의 삶에 애착이 깊고, 씨앗을 하나하나 심어서 가꿔온 나의 정원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