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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Sep 15. 2021

연극은 인간이란 생물이 하기에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 <확장된 현실에서의 몸의...>을 중심으로

필자: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토크일시: 2021-07-04 (일) 오후4시

장소: 디스이즈낫어처치 (This is not a church)


본고는 서울변방연극제 블로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mtfestival/222457209463


초록 (Abstract)

올해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는 몸에 대한 사유에서부터 출발해 연극과 과학 사이의 교차, 현실과 만남에 대한 고찰로 마무리되며, 기술이 불러오는 진정한 관계성의 상실과 두려움에 대해 인식하는 시간이 되었다. ‘예측 불가능성, 100%, 확장된 현실, 촉각이 사라진 사회’ 등 많은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각도, 몸도, 관객과의 정서적 연결도 이 모든 것이 100%가 가능한 세상이 올까? 세상과 생물에게 100%라는게 존재할까? 우리는 온전(穩全)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된 완벽함에 대한 집착과 개발은 교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고찰한다.1) 교만은 곧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SNS 속 필터링(filtering)된 허상의 이미지를 자신이라고 믿는 동시대에서, 자신보다 ‘잘’생긴 사진을 자신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은 타인보다 ‘못’생겼다고 믿는 우리는 기술이 주는 자기파괴를 무한반복 하고 있다.2) 본 토크를 통해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스스로 응답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법도, 과학도, 그리고 연극도 종국에는 각자만이 가진 고유한 변방적 포지션들이 ‘인간’이라는 소우주(小宇宙)를 중심으로 모여야 함은 변함없는 지향점이자 과제이다. 어쩌면, 100%가 아니기에 발생하는 우연과 순간의 소중함 속에서 연극의 새로운 가치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 의문을 남긴 채 디스이즈낫어처치를 떠났다. 비록 토크의 100%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필자 스스로일지라도 소중한 축제의 장, 그 1%를 써보겠다는 온전한 마음을 가진 채 말이다. 결국 연극은 인간이란 생물이 하기에.      


본론

드디어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가 중반부로 치닫았다. 비 오는 일요일, ‘디스이즈낫어처치’에는 각자가 위치한 변방으로부터 인물들이 모였다. 서울변방연극제 선언문(2012~)의 ’서울변방연극제는 연극이 아닌 모든 것들의 연극제입니다.’라는 문구 답게, 연극의 안밖과 경계를 맴돌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을 초청하는 변방스러운(marginal) 자리였다. 이번 토크의 주제는 ‘확장된 현실에서 몸의 감각, 감각의 몸’이다. 5명의 패널[1]과 약 20명의 참여자들이 모여 ‘몸’에 대한 사유와 질문들을 펼치는 자리였다. 예술감독 이경성의 진행으로 토크의 도입부에서는 각 패널들이 준비한 오브제들을 만나보는 시간이 펼쳐졌다. 과연 그들은 어떤 오브제와 사연들을 가지고 왔을까?


인형작업자 이지형과 인형 (C) 한민주

이지형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관절인형을 가져왔다. 김원영은 휠체어를 가져왔고, 정세영은 아주 작은 하얀색 3D 프린팅 석고 피규어를 가져왔다. 또한 허윤경은 <미니어처 공간 극장> 신촌극장 공연에서 관객이 써준 종이쪽지를 가져왔다. 이어 장동선은 책과 작고 말랑거리는 뇌 오브제를 가져왔다. 패널들은 각자의 오브제를 소개해주며 그것을 가져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특히 필자에게 인상깊었던 오브제는 ‘몸’과 관련해 편집될 수 없는 창작자의 기억이 새겨진 것들이었다. 


변호사, 연극배우 김원영 (C) 한민주

바로 김원영의 휠체어를 비롯해 허윤경의 종이쪽지였다. 김원영은 “휠체어는 나의 움직임의 특성을 반영해준다.”라고 언급한 바, 한 몸과 같은 휠체어가 ‘과연 패션의 일부일 수 있을까?’와 같은 일상 속 사유를 공유했다. 그리고 허윤경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라 언급하며, 무대 위 무용수의 정지와 관객의 정지가 동일선상에 오는 지점에 대해 사유했다. 이어서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작 <미니어처 극장 공간>의 발전과정을 공개했다. 이 공연은 선돌극장[2], 신촌극장, 온라인 등 여러 단계를 거쳐 실험 되었다.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초청공연 <미니어처 공간 극장> (C) 고나연, 한민주

본고는 <미니어처 공간 극장>의 실험 변천사를 COVID-19(이하: 코로나) 전과 후로 나누어본다. 제 19회때는 코로나 이전이라 관객과 함께 같은 물리적 극장 공간에서 호흡하고, 뛰고, 몸에 대한 실험을 마음껏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촌극장 때는 코로나 이후이기 때문에 극장에서는 소수의 관객을 만났고, 이 때 구글설문조사와 허윤경의 이메일로 관객의 쪽지를 사전 모집했다. 마지막으로, 온라인 공연에서는 관객의 두 층위를두고 작업을 했다(대면 관객과 비-대면 관객). 허윤경은 오프라인 대면 관객과 함께 스코어를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온라인 비-대면관객이 3D 가상공간에 들어가 쪽지를 쓸 수 있도록 고안했다. 그렇게 허윤경이 가져온 쪽지는 곧 자신의 ‘몸을 기억하는 작업'을 상기시켜주게 되었다.


장동선 뇌과학자가 풀어주는 과학이야기[3]와 연극이 만나는 지점도 토크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장동선은 99년도부터 과학을 시작하며, 그 세월 가운데 반년을 연극과 함께 한 인물이다. 뇌과학과 연극이 가진 접점이 ‘실험’에 있다고 언급하며, 연극과 과학 실험의 다른 점은 과학 실험의 ‘통제적 환경(controlled setting)’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사이의 실험은 요컨대, 어떤 요인(factor)이 신호(signal)를 주고, 반응(expression or activation or repression)하게 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임을 밝혀주었다.[4] 특히 그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다른 인간을 인지하는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사람의 몸이 주는 신호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돌발적 반응이 가능함을 시사하며, 이것을 실험 데이터로 구축하려면 가상현실을 만들어 1000회가량 시뮬레이션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동선과의 대화는 ‘확장된 현실에 왜 과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물음에 가 닿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실제 세상이 아니어도 연극을 통해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점을 상기시켰다. 뇌가 행하는 판단 신호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력과 이야기쓰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 즉

, 메타버스(metaverse)[5]는 곧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허윤경은 이어 창작자로서 몸과 매개된 고민을 이어갔다. 관객을 만나지 않는 온라인 공연을 진행한 바, 가장 고민되는 지점이 바로 ‘촉각’에 대한 것이다. 그는 토크 현장에서 “모든 감각은 촉각이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비-대면관객에게 ‘본인이 있는 물리적 공간에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다’라는 디렉션을 준 점을 나누었다. 그는 ‘어떻게 공간 안에 있는 몸의 감각을 살릴 수 있을까?’에 천착하며,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타인의 신체를 더욱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도달했다. 그는 제 19회 <미니어처 공간 극장>의 경우에는 관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했다. 관객-수행자(player)[6] 각자를 끌어낼 수 있는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다. 몸들에는 무수히 다른 ‘mode’들이 존재하여, 다른 맥락에서 쓰여지는 몸에 대해 흥미를 기울였다. 기실 코로나로 인해 ‘촉각’에서 점점 멀어지는 공연예술계다. 다양한 예술 안에서 공연예술이 가질 수 있는 막강한 감각인 촉각, 그 감각을 계속 가져가기 위해 앞으로 어떤 시도를 창작자들이 해야 할 지 그 행보에 주목해야 할 바다.


          필자는 ‘촉각’에 대한 패널들의 사유를 통해 한가지 경험이 떠올랐다. 우리에게는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며 어떤 사람과 순간을 추억한다. 또 애도한다. 이러한 사진에 대해 역사학자 마틴 제이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 불안함의 근원이었다.”(Jay, 579)라고 언급한다. 사진은 곧 대상의 부재(不在) 곧, 죽음을 암시한다. 현존하는 우리는 잊혀지고 싶지 않음에 대한 갈망을 사진찍기 행위로 해소한다. 그리고 문득 그리운 사람이 보고싶은 경우, 그 사람의 사진을 꺼내본다. 그 때, 사진 속 인물을 깊이 응시할수록─사진이 가진 불안함에 다가갈수록─인물과 경험했던 감각이 즉, 응시하는 이의 몸에 이미 새겨진 감각이 부활한다. 사진 속 인물의 주름, 갓 자라서 까끌까끌한 수염, 평평했던 뒷통수, 특유의 냄새, 목소리 등 그 순간 부재하는 인물이지만 실재하는 인물처럼 응시자에게 다양한 감각이 피어난다. 대상이 부재하지만 현존하는 것처럼 대상에 대해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발생한다.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김원영이 토크에서 언급한 ‘편집할 수 없는 순간(uneditable moment)’과 같은 선상으로 놓아본다. 즉, 몸에는 개개인의 시공간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허윤경이 앞서 언급한 행위자와 관객이 함께 ‘정지되는 순간’과 연관하여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감각의 층위에 대한 사유와 연결시켜보고자 한다.


          “무엇이 이 층리들로 하여금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만드는가? (…) 더 재미있는 세 번째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동적인 가정일 것이다. 감각의 층들은 움직임의 순간들 혹은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정지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연속으로 보면 종합적으로 그 한 움직임을 재구성할 것이다.”(Deleuze, 53)


회화와 감각에 대해 들뢰즈가 언급한 감각의 층위들의 통합을 살펴보며, 허윤경이 언급한 행위자─육체를 멈춤으로서 자신의 정신 안에 발생하는 다양한 감각을 느끼는 자─와 관객─행위자의 멈춰진 육체를 바라봄으로써 느껴지는 것들을 감각하는 자─사이의 감각의 재구성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아주 동적인 부동(不動)이요, 큐비즘(cubism)[7] 회화와 같이 연속적으로 나아갈 때 움직임을 재구성 하게된다. 즉, 응시-바라봄을 통해 정지되는 순간에는 시공간이 응축된 몸 안에서 역동적인 감각들이 재구성된다. 또한 들뢰즈는 부조리극 작가 베케트(Samuel Beckett)와 카프카(Franz Kafka)를 언급하며 ‘움직임’과 ‘부동’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층에 대해서도 주장한다.


“베케트나 카프카의 공식에 따르면 움직임 너머에는 부동이 있다. 서 있는 자 너머에는 앉아 있는 자가 있고, 앉아 있는 자 너머에는 누워 있는 자가 있고, 마침내는 사라진다. 진정한 곡예는 동그라미 속에서 하는 부동의 곡예이다. (…) 한마디로 움직임이 감각의 층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층들이 아직 남아 있는 움직임을 설명한다.”(Deleuze, 54)


움직임과 부동 사이의 관계에서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감각의 층’이라는 들뢰즈의 이러한 주장은 회화라는 평면을 넘어, 현실을 넘어, 이제는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움직임과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 줄 수 있으리라 고찰한다. 확장된 현실 속에서 감각의 층이 행위자와 관객 사이에 새롭게 재구성되기 위해서 아바타(avatar) 등 다양한 기술이 현재 개발되고 있지만, ‘연극’을 매개로 만난 이번 토크의 참여자들은 ‘만남’의 가치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만남의 형식 또한 기술에 의해 변해가는 시대에서, 예측 가능한 만남에 흥미를 잃어가는 관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도 도출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만남의 재미를 위해서는 예측 불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가상현실은 만남을 연구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인 것이다.

[8]


나아가 현존성과 현장성(liveness)에 대해서도 대화가 이어졌다. 현존성도 기록매체가 발달하면서 등장한 개념이고, 관객의 존재에 의해 예측 불가능성이 나온다는 주장이 펼쳐졌다. 필자는 이에 대해 마리나 아브라보비치(Marina Abramovic)의 <성 토마스의 입술 (Lips of Thomas)>(1974)을 살펴본다. 위 공연에서 아브라보비치가 스스로에게 가학적 채찍질을 끊임없이 행할 때, 관객-인간으로서 윤리적 경계선인 중간상태(liminal area)에 도달한 관객이 공연을 중지시켰던 예측 불가능성을 재고한다.

<성 토마스의 입술> (C) Hypotheses[9]

토크의 막바지에서는 현실에 대한 중요한 사유가 오고갔다. 장동선은 현실(reality)의 어원인 ‘리얼리타스(라틴어: reálĭtas)’는 ‘내 주변과 연결되어 있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현실이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세상을 인지 및 감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요컨대, 우리가 서로 연결(connection)되기에 현실이라는 점이다. 타자 없이는 현실이 존재할 수 없다. 마치 관객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무대처럼 말이다.


영화 <써로게이트>(2009) (C) SBS Movies[10]


이어서 이경성은 <The Robot>이라는 음악을 재생하며 함께 감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후 패널들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진행되었다. 필자는 영화 <써로게이트>(2009)[11]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장동선에게 질문을 했다. “먼 미래에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 정말 인간의 정신이 오브제나 새로운 몸에 깃들 수 있을까요

?”(조혜인) 다소 막연한 질문이었지만 장동선은 컴퓨터공학의 관점과 생물학의 관점 두 가지로 나누어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를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복제될 사람의 100%가 복제 가능하다는 ‘믿음’ 하에 연구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100%가 구현되어야한다. 컴퓨터공학자들의 경우에는 복제가 될 거라는 견해가 크지만, 생물학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다.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이라는게 어떤 사람에게는 발현되는 유전자가 있고, 발현되지 않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도 인간의 모든 유전자를 분석하기 위한 시도였다.[12] 또한 나의 사진을 찍어도 그것은 나의 진정한 100%가 아니다.”(장동선)


올해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는 몸에 대한 사유에서부터 출발해 연극과 과학 사이의 교차, 현실과 만남에 대한 고찰로 마무리되며, 기술이 불러오는 진정한 관계성의 상실과 두려움에 대해 인식하는 시간이 되었다. ‘예측 불가능성, 100%, 확장된 현실, 촉각이 사라진 사회’ 등 많은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각도, 몸도, 관객과의 정서적 연결도 이 모든 것이 100%가 가능한 세상이 올까? 세상과 생물에게 100%라는게 존재할까? 우리는 온전(穩全)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된 완벽함에 대한 집착과 개발은 교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고찰한다.[13] 교만은 곧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SNS 속 필터링(filtering)된 허상의 이미지를 자신이라고 믿는 동시대에서, 자신보다 ‘잘’생긴 사진을 자신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은 타인보다 ‘못’생겼다고 믿는 우리는 기술이 주는 자기파괴를 무한반복 하고 있다.[14] 본 토크를 통해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스스로 응답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법도, 과학도, 그리고 연극도 종국에는 각자만이 가진 고유한 변방적 포지션들이 ‘인간’이라는 소우주(小宇宙)를 중심으로 모여야 함은 변함없는 지향점이자 과제이다. 어쩌면, 100%가 아니기에 발생하는 우연과 순간의 소중함 속에서 연극의 새로운 가치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 의문을 남긴 채 디스이즈낫어처치를 떠났다. 비록 토크의 100%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필자 스스로일지라도 소중한 축제의 장, 그 1%를 써보겠다는 온전한 마음을 가진 채 말이다. 결국 연극은 인간이란 생물이 하기에.


미주

[1] 인형작업자 ‘이지형’, 변호사이자 2020년 5월자 신문 기준 서울지방변호사회 장애인인권소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 아티스트 ‘김원영’,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참가 아티스트 및 안무가 ‘정세영’과 ‘허윤경’, 궁굼한뇌 연구소 대표 뇌과학자 ‘장동선’이 패널로 참석했다. 에이블뉴스, <연극하는 변호사, 82년생 김원영>, 에이블뉴스, 2020-05-18,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30&NewsCode=003020200511184245403763#z

[2]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허윤경 창안, <미니어처 공간 극장>, 2019-07-07(일)~08(월). @선돌극장

[3]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경생물학(neurobiology)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4] 필자는 이를 ‘연극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로 풀어보고자 한다. 연극에서는 행위자:행위자, 행위자:관객, 행위자:공간 등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communication)으로 인해 어떠한 표현(expression)이 창출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은 바로 ‘관객’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한편, 과학에서의 상호작용이라 함은 분자간의 신호 반응(molecular signal response)을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여러가지 신호전달인자(signal factor)나 효소(enzyme)들이 수용체(receptor)와의 결합(binding)으로 인해 유전자의 발현(gene expression)이 일어나며 돌연변이(mutant)나 정상 메커니즘을 야기한다. 이처럼 생물에서 일어나는 분자단위의 상호작용에서도 100%의 확률이란 없으며, 생물체가 가진 다양한 변수와 환경과의 후천적 요인에 의해 언제나 예측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를 연구하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란 학문이 따로 있다. 후성유전학에서는 전통적인 유전학(genetics)을 뛰어넘는 유전적 현상들을 연구한다. 또한 유전자 발현 과정이 잘못되어 나타나는 예로, 인간의 염색체(chromosome) 복제(replication)과정에서 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과잉 복제가 일어나면 다양한 증후군(syndrome)이 발생됨을 알 수 있다. 상염색체(autosome, 성염색체가 아닌 염색체) 21번의 수가 하나 더 많아져 생기는 ‘다운증후군(down syndrome)’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처럼 연극과 과학은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고통과 신비를 함께 공유한다.

[5] “메타버스(Metaverse)는 현실세계를 나타내는 Universe에 ‘상위의, 뒤에, 넘어서’ 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어 Meta가 결합한 말로서 풀이하면 ‘우주안에 만들어진 의사적인 소우주’를 의미한다.” 서성은, 「메타버스 개발동향과 발전전망 연구」, 『한국HCI학회 학술대회』 Vol.2008 No.2, 2008, 600쪽

[6] 여기서 수행자를 ‘performer’가 아닌 ‘player’로 표현한 점은, 관객이 허윤경의 지령을 받고 역동적으로 수행하는 과정 가운데 발생하는 유희적 순간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7] 큐비즘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사실주의적 회화 양식과는 거리가 있다. 깊이와 공간감, 산산히 부서진 형태들로 표현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새롭게 재조합되는 특성으로 나타난다. 큐비즘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로 파블로 피카소(Pable Picasso)를 예로 들 수 있다.

[8] 서울변방연극제,「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 ‘확장된 현실에서의 몸의 감각, 감각의 몸’ 패널들로부터의 토크 질문 혹은 단상들」, 2021, 앞쪽

[9] Christine Jeanneret, <Performance, Performativity, Privacy>, Hypotheses, 2020-11-30, https://privacy.hypotheses.org/1391

[10] 

Craig Mathieson, <Surrogates Review>, SBS MOVIES, 2009-09-23, https://www.sbs.com.au/movies/review/surrogates-review 

[11] 조나단 모스토우(Jonathan Mostow), <써로게이트(Surrogates)>(2009), 미국, 88분. 한 박사가 장애인을 위해 인공의체 ‘써로게이트’를 개발했는데, 비장애인들이 남용하며 사회가 바뀌었다. 써로게이트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 할 정도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몸을 집에 둔 채 써로게이트를 입고 직장생활, 연애 등 일상을 보낸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진정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이다.

[12] 게놈 프로젝트는 쉽게 말하면, DNA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게놈(gene+ome=한 생물의 전체 유전자)의 모든 염기(base) 서열을 해석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gene mapping) 연구다. 이 연구를 통해 각종 질병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

[13] 온전(perfection)의 정의에 대해서 고찰해본다. 온전함이란 부족함 없고 마음 자세나 동기가 순수하고, 행위가 진실하고 올곧으며, 목표하는 바가 흔들림 없는 상태이다. 기독교적 사상에서는 이러한 온전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이를 믿는 인간은 온전한 품행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언 2:7) 

[14] 본 토크에서 장동선 뇌과학자가 언급한 ‘SNS 사진과 자기인식에 대한 실험’ 내용을 참고하였다.


참고문헌

서성은. 「메타버스 개발동향과 발전전망 연구」. 『한국HCI학회 학술대회』 Vol.2008 No.2. 2008. 1450-1457

서울변방연극제.「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 ‘확장된 현실에서의 몸의 감각, 감각의 몸’ 패널들로부터의 토크 질문 혹은 단상들」. 2021

에이블뉴스, <연극하는 변호사, 82년생 김원영>, 에이블뉴스, 2020-05-18,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30&NewsCode=003020200511184245403763#z 

Deleuze, Gilles 지음. 하태환 옮김.『감각의 논리 :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6 회화와 감각」. 민음사. 2008

Jay, Martin 지음. 전영백 외 옮김.『눈의 폄하 :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시각과 반시각 (Downcast Eyes)』. 「8장. 메멘토 모리로서 카메라: 바르트, 메츠 그리고『카이에 뒤 시네마』」. 서광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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