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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Jan 02. 2022

변방적 비평문 쓰기의 과정 실험

‘비평가-화가(Critic-Artist)’ 되기

변방적 비평문 쓰기의 과정 실험: ‘비평가-화가(Critic-Artist)’ 되기


필자: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본고는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활동을 통해 작성되었으며, 2021년 시행된 노원 문화PD 활동의 일환으로 필자의 브런치에 개제됨을 주지한다. 그 이유는, 노원에도 필자와 같이 공연에대해 사유하길 좋아하고 글을 쓰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노원에도 자신만의 예술관을 확장시키려는 이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그 존재들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더욱 다양하게 마련되기를 바란다. 

특히 본고는 특정한 공연 그 자체에 대한 글이기보다는 공연을 바라보는 비평가에 대한 관점, 위상, 역할에 관해 필자만의 사유가 녹아든 글이다.


필자의 글은 아래의 서울변방연극제 공식 블로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mtfestival/222447655157


    본고의 가장 첫번째 서론은 필자가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을 활동을 통해 어떻게 제 19회때와는 다른 비평에 대한 접근 방식을 수행해 볼 것인가에 대한 단상이다.[1] 지난 회와 다른 비평의 방식을 하고자 필자가 사유하게 된 점은 이번 회의 서울변방연극제 지원서 쓰기로부터 출발된다. 지원서를 쓰는 과정에서 글 이외의 비평양식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답변을 아래와 같이 했다.


6. 글 이외의 비평양식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신 적이 있나요? 
“갑자기 드는 생각엔, 공연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을 녹음기에 중얼거려보기입니다. (사유가) 무르익어서 쓰는 비평글도 깊이가 있지만, 현장 묘사를 생생하게 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즉시 드는 감각이나 생각을 놓치지 않는 민첩함도 비평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데 공연이 끝나면 바로 퇴장해야하는 분위기라서 우리나라에서 하기가 좀 어렵지 않을까요...? (비평가의) 기억력과 민첩함에 한계가 있으니, 이런 저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공연 때 메모지를 늘 들고다니는 편입니다. 객석의 어둠속에서 눈은 무대를 향하고 손은 메모지 위를 움직이는데 공연이 끝나고 들여다보면 글씨가 삐뚤거리지만 당시의 감각을 전달해주는데 큰 영항을 줍니다.” (조혜인, 2)
      

    

    비평가는 일반적으로 공연장에 들어서고 프리셋(preset)을 마주하는순간 공연이 시작되기 전 짧은 시간 안에 무대가 주는 방대한 정보들을 수집해서 비평문의 가장 중요한 단계인 ‘프리셋 묘사’를 하게된다. 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셋의 순간동안 필자가 본 무대의 사실을 언어로 충실히, 민첩하게 재현해 나갔고 그것을 비평문에 옮겼다. 그러므로 기실 지원서에 적은 대답과는 다르게 현실에 맞는 비평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서도 새로운 비평과정에 대한 아이디어는 부족했다. 게다가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의 개막작 <재주는 곰이 부리고>가 행해질(performing) 디스이즈낫어처치(구: 명성교회)의 서커스 입구와 같은 천막을 거쳐 객석으로 들어가보니 프리셋에대한 묘사와 언어화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우선은 관객비평가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메모장을 꺼내 프리셋을 골똘히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커스에 사용될 수많은 오브제들과, 용도가 불분명한 낯선 오브제들, 감성보다 물성을 자극하는 소리, 예배가 이루어졌던 장소가 주는 방대한 깊이감 등을 단순한 언어로 전달하기엔 비평가의 양심이 부족했다. 비평가는 자신이 경험한 장소에 대해서 독자보다 쉬운 접근성을 가지고 문장으로 풀어내지만, 비평문을 읽는 독자는 공연이 이뤄진 장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평가의 전달력이 100%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의 제의적이고 기묘한 프리셋을 어떻게 묘사해야할까? 필자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공연 후 원초적인 기억력에 의존해야 할까? 가만히 무대를 응시하던 필자의 눈과 생각이 따로 반응하던 그 때, 객석에서 스마트폰 카메라소리가 들렸다. 주지 할 만한 사실은, 관객들은 공연의 순간을 소유하고 싶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곤 한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며 이미지와 허상이 남용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진정 귀한 것을 실물로 영접했을 때 소유욕이 발생하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쉽게 욕구를 채운다.


    필자는 공연의 프리셋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프리셋은 행위자(performer)가 관객(spectator)에게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처음의 것을 바치는 무대라는 제단(祭壇)이다. 가장 흐트러짐 없는 상태이며, 그 상태와 시간이 주는 정결함(pureness)이 존재한다. 필자는 이러한 프리셋의 의미를 새겨보며 관객의 소음, 스마트폰 촬영소리, 프리셋 음향, 디스이즈낫어처치의 긴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등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물리적 자극 속에서 다시한번 볼펜을 잡았다. 문장을 쓰고, 사진을 찍는 행위 대신 프리셋의 신성한 공간을 메모장에 드로잉 하며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드로잉은 비록 사진만큼의 정확함과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오롯이 프리셋의 순간을 하나하나 드로잉해가며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질감 등 물성(物性)을 감각할 수 있었다. 또한 명암을 느끼며 공간의 깊이를 채워가는 드로잉을 통해 공간의 구석구석을 더욱 세밀히 관찰해 볼 수 있고, 드로잉의 손길이 닿는 곳 마다 무대로 육체 대신 정신을 보내어 한 명의 무대 탐험가가 될 수 있었다. 즉, 필자는 새로운 비평과정의 실험으로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에서 ‘비평가-화가(Critic-Artist)’가 되어보는 선택을 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2021) 프리셋 (C) 조혜인


    무대를 그려보는 과정은 비록 필자가 직접 그 순간에 무대에 난입할 수 없을지라도, 몰입을 통해 정신을 무대로 보내 여러 곳곳을 흐를 수 있었다. 즉, 공연이 세팅(setting)해 놓은 물성과 관객이 주는 물성들이 불안정하게 섞여 있는 프리셋의 순간에서 필자는 홀로 자유롭게 디스이즈낫어처치 가운데를 떠돌은 것이다(wander).[2] 이 때 비평가-화가는 쉽게 사진으로 찍히고, 비평가의 입장에서 쉽게 묘사할 수 있는 공연의 첫 인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만나는 대상의 이모저모를 천천히 지켜보며 관계를 맺어가듯 무대를 대하게 된다. ‘화가’가 화폭에 담길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과 흡사하게 비평가-화가도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 자크 데리다(Derrida)에 의하면 화가는 풍경을 대하던 정물을 대하던 응시와 동시에 ‘눈멂’을 경험한다. 요컨대, 화폭과 대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눈 중 어느 한쪽은 바라봄을 중지시켜야 한다. 화가는 대상이 이미 앞에 있음에도 부재를 경험하게 되며, 다른 한 쪽의 기억에 의존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3] 이러한 데리다의 사유는 눈의 권력 그리고 눈으로 인해 감상하는 예술품들로 이뤄진 박물관에서 눈멂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제시하기 위함이지만, 비평가-화가에게 봐야함(watching) 즉, 되도록이면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한다. 드로잉을 함으로서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집착이 아닌, 정서적으로 무대를 유랑하고 있는 비평가-화가는 무대가 지니는 찰나의 성질과 마주한 개별적 디테일들과 1:1로 몰두하게 된다. 무대에 대해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비평가-화가의 의무가 아님을 다시한번 제고한다.


    비평가-화가의 또다른 변방적(marginal) 가능성은 비평가와 예술가 사이의 경계 허물기에 있다. 본고에서 ‘비평가-화가’라고 칭함으로 인해 주지해야 할 사항은, 비평가-화가의 조건에 있어 그림실력의 우열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평가-화가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얼마든지 무대를 유랑할 수 있다. 표현의 결과가 구상(representational)이던 추상(abstract)이던 오로지 비평가-화가의 고유한 작업방식에 달려있다. 또한 정서적으로 무대를 유랑하는 동안 전체적인 화폭을 채워 넣을 수도 있고, 특수하게 몰입되는 오브제나 빛 한줄기를 집요하게 탐색할 수도 있다. 무대를 어떻게 유랑할 것인가는 오로지 비평가-화가의 몫이다. 이러한 다양한 유랑의 과정 속에서 비평가-화가는 기존의 ‘비평가’의 정의를 해체한다. 본래 비평가는 작품의 특성과 가치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의 역할을 하고, 작품에 대해 글쓰기를 통해 재생산함으로 예술가와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며 거리두기를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비평가-화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비평을 새롭게 접근했을 때, 비평가-화가는 비평 과정의 첫 단계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표현을 시작한다. 단순히 복기(復碁)를 위해 무대 위에 있는 사실(fact)을 짧은 단어나 문장으로 민첩히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만져볼 수 없는 무대 속으로 자신의 정신을 투영시켜 마주하는 대상들을 느낀다. 공연이라는 일회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비평가-화가의 손길이 담긴 표현은 공연이 끝난 뒤 하나의 작품이 된다. 요컨대, 비평가-화가는 비평가의 정신으로 공연장으로 향해, 객석에서 예술가-비평가 되기의 사이를 오고 가다가, 공연이 끝난 후 다시 공연 및 자신이 창조한 작품을 자가 비평(self-critic)할 수 있는 비평가가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전이영역(liminal area)으로 비평가-예술가는 스스로를 위치시키며 기존의 비평가와 예술가의 역할 또한 각각의 분리된 중심에서 변방으로 이동된다.
         


          

<Finishing the arabesque>(1877) (C) Edgar Degas[4]


    이상으로 변방적 비평문 쓰기의 과정 실험에 대한 단상을 마무리한다. 필자는 두 번째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의 경험 중에서 새로운 비평양식에 대한 고찰을 하며, 본고를 통해 ‘비평가-화가’ 되기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한다. 제 20회의 개막작 <재주는 곰이 부리고> 외에도 관객으로 참여하게 될 공연에서 ‘비평가-화가’ 되기에 대한 변방적 실험을 해볼 바이다. 신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모든 성물들이 제단 위에 흠 없이 마련된 듯한 프리셋의 숭고한 순간 외에도 역동적인 행위자의 움직임이 살아있는 인상적인 장면 또한 드로잉을 해볼 수 있겠다. 마치 에드가 드가(Degas)가 당대 깊숙한 음지로부터 아름다운 날개를 펴기 위해 춤을 추는 여성 무용수들의 동적인 순간을 포착했듯이, 사진과 영상이 보여주는 움직임이 아닌 비평가-화가의 반(half) 시각으로 행위자들과 함께 순간을 유랑한다면 연극적(theatrical) 비평쓰기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바이다.


미주

[1] 필자는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활동을 통해 丙 소사이어티 <신토불이 진품명품>의 비평문을 기고한 바 있다. 제 19회때는 관객비평가들에게 비평문 쓰기는 의무적인 활동사항이 아니었다. 쓰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자원을 하여 전강희 프로그래밍 디렉터와 개별적으로 소통을 했고,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과 매칭(matching)을 통해 비평문이 게재되었다. 필자는 이후에도 丙 소사이어티의 작업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동일한 해, 동일한 매체에 <Patriotic Insanity>의 비평문 또한 기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기고는 하지 않았지만 안무가 허윤경 창안의 <미니어처 극장 공간> 관객으로서 공연이 지닌 특성에 주목하며, 창작자 허윤경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니어처 극장 공간>은 기존 연극이 지향하는 특정한 의미 생산에 대해 거부하고, 극장 공간이 주는 다양한 즉물적 변화 그 자체에 대해 관객이 감각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지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공연이 탐구하고자 하는 공간과 관객의 관계를 경험하게 한다. 필자는 허윤경으로부터 ‘공간 안에서 두 번째로 어두운 곳에 위치하세요.’라는 지령을 받았고 한 명의 참여자 및 즐거운 플레이어(player)로서 그 지령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면서 다른 지령을 받은 몸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몸과 몸이 극장이 선사하는 환경변화에 반응하며 유희적 연결성을 맺었다. 그 상호작용 중 특이했던 점은, 한 참여자가 은밀히 필자에게 자신의 지령쪽지를 보여주며 시종일관 필자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밝힌 점이다. 극장-관객, 관객-관객 사이의 관계맺기는 지령을 통해 예측불허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이처럼 <미니어처 극장 공간>의 인상적인 경험 이후로 허윤경의 행보를 기대한 바, 필자는 허윤경이 출연한 공동창작 버바팀 연극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2020)에 대한 2019 청년예술지원사업 청년예술단 리뷰/비평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혜인 씀 ∙ 채민 편집, 「[리뷰] 국가와 사회에 대항하는 자기 이야기를 통한  ‘ 퀴어적 전환 ’ 을 시도하기 :  丙 소사이어티 의 <신토불이 진품명품>」,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9-08-06, https://indienbob.tistory.com/1140.  조혜인 씀 ∙ 채민 편집,「[리뷰] 편지로 실험하는 애국적 광기 : 丙 소사이어티의 <Patriotic Insanity>를 중심으로」,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9-12-20, https://indienbob.tistory.com/1152?category=226688. 조혜인, 「공감의 버바팀: 나=너 -스페이스몽키 <은하계 제국에서 랑데부>를 중심으로-」, 브런치 퍼포먼스 리뷰 PERSIM 퍼짐, 2020-02-03, https://brunch.co.kr/@hichotheatre/27

[2] 독일어로 ‘여행하다, 떠돌다’ 라는 동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새들이 여기에서 저기로 자유롭게 이동하듯 ‘방랑’과 ‘유랑’의 어감에 더욱 가깝다. 특히 독일에는 ‘Wandernkultur’가 유명하다. 직역하면 ‘떠돌이문화’ 라고 할 수 있겠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Wandernkultur는 아주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장인들이 새로운 경험을 얻기 위해 “마땅한 일”이었고, 구직자나 상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새로 시작해야했다. 그리고 베를린의 학생들은 도시의 규제를 피하는 방법으로 대자연에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의 Wander 활동이 조직화되기도 했다. Gudrun Stegen, <Das Wandern ist des Deutschen Lust>(조혜인 번역: 유랑은 독일의 열망입니다), DW, 2010-08-05, https://www.dw.com/de/das-wandern-ist-des-deutschen-lust/a-5862089

[3] Derrida, Jacques,『눈먼 자의 기억: 자화상과 다른 잔해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 예술미학 강의노트 (교수자: 황선영), 조혜인 정리, 2021-05-18

[4] Edgar Degas, Finishing the arabesque 1877, oil and essence, pastel on canvas, 67.4 x 38 cm Musée d’Orsay, Paris (RF 4040),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Peter McPhee, <Edgar Degas: Capturing a world of movement – Degas and the tumult of Paris in the late 1800s>, PURSUIT, 2016-06-23, https://pursuit.unimelb.edu.au/articles/edgar-degas-capturing-a-world-of-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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