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거리는 교집합에서 멀어지는… 그리고 관객
필자: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관객비평단)
관극일시: 2021-07-04 (일) 오후 1시
장소: 디스이즈낫어처치(This is not a church)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의 첫 번째 워크룸이 시작되었다. <발표 2>는 양손프로젝트의 ‘양종욱’배우와 ‘공연창작집단 뛰다’(이하: 뛰다)의 ‘황혜란’배우가 만나 시작된 작업이다. 그들은 본 워크룸 이전에 서로가 가진 공연에 대한 화두를 나누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졌다. 올해 2월, 성북구의 한 연습실에서 “각자의 질문과 시선이 담긴 실연”(양종욱)을 해보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6월 중으로, 양종욱은 개인의 SNS 게시글을 통해 자신의 셀프 영상 <발표 1>에 대한 언급을 하며, 동료작업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을 발견해보려는 시도를 했다.[1] 이는 본 워크룸을 통해 그 소통의 시도가 확장된다. <발표 2>를 소개하는 양종욱은 이를 연습, 훈련, 리서치가 모두 뒤섞인 작업임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황혜란이 등장한다. ‘뛰다’의 3년상 장례식으로서, “아, 여기(디스이즈낫어처치)에서 장례식을 치러야겠다” 라는 사유를 관객에게 공유한다. 황혜란의 작업은 그의 사적 사유로부터 출발된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70대 할아버지가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포착한 그는, 그 도시락이 가진 좁은 공간감을 통해 한 사람의 응축된 인생을 보았다. 그렇게 황혜란은 자신의 몸을 ‘아카이브(archive)로서의 몸’으로 사유했고, 이것이 ‘뛰다를 어떻게 보내줄까?’로 확장된 것이다. 황혜란은 첫째로, ‘툭 치면 나오는’ 공연의 조각들(pieces)을 보여줄 것이고, 둘째로, 여러 창작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몸에 형성된 여러 체계(system)들과 함께 그 짤막한 조각들을 이어 붙인 실연이 될 것임을 언급한다. 이는 ‘뛰다’가 가진 훈련의 역사를 관객과 나누는 순간으로 나아간다.
황혜란의 가장 첫번째 조각은 ‘햄릿에 대한 오필리어의 절규’다. 이는 뛰다에서 주로 실행되는 ‘가면훈련’을 응용한 조각이다. 가면훈련은 배우에게 형태에 대한 감각을 명확히 인식하게 한다. 황혜란의 조각을 감상할 수록, ‘뛰다’는 하드웨어(몸)와 소프트웨어(마음)의 균형 즉, ‘몸-마음’을 중요시 여김을 알 수 있다. 황혜란이 “내가 왕이다-” 라고 발화하는 순간 벌어진 입의 감각을 통해 행위자와 관객 사이의 순간의 정지가 발생된다. 또한 ‘박수’에 대한 조각이 실연된다. 관객에게 일정한 리듬의 박수를 유도하는 황혜란은 광대가 되어 그 박수에 맞춰 리듬에게 얻어맞는 행위를 한다. 또한 황혜란은 ‘뛰다’는 인형과 오브제를 많이 다루는 점을 주지시킨다. 그에게는 이러한 훈련은 배우로서 “생명이 있다는 게 뭐지?”, “살아있다는 게 뭐지?”를 감각하게 하는 것이다. 생명과 리듬. 이에 대한 조각을 찾아내는데 황혜란은 4년이란 인고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살아있다는 건 어떤 리듬을 갖는다” 라고 언급하며, 배우가 오브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사유한다. 요컨대, 배우가 오브제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따라 오브제에게 생명력이 깃들며 살아나는 것이다.
황혜란은 계속해서 조각들이 파편 그 자체로 남지 않고 ‘잇는 행위’를 통해 살아있게 만들고자 한다. 그에게는 ‘리허설의 반복’의 이유가 바로 그러한 이유 에서다. 그저 ‘기억과 체화’만을 위한 리허설이 아닌 반복과 잇기를 통해 공연에 ‘생명력을 창출’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갖고 리허설에 임한다. 또한 ‘뛰다’ 작품에서는 ‘광대’를 빼놓을 수 없다. 황혜란은 광대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사유를 공유한다. 특히 ‘빨간 코 광대훈련’은 그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에 섰을 때 모든 것이 들통나버릴 것만 같은 견디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던 점을 밝힌다. 그러나, 황혜란에게 특히 ‘광대’ 역할에 있어서는 위와 같이 자기 자신이 날것이 되는 감정을 주었고, 사랑받으려고 애쓸수록 광대 역에 도달하기 힘든 순간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의 황혜란은 광대에 대해 다시한번 사유한다. 그는 어느 순간 “이런 존재(광대)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광대는 자신 안에 있는 놀이근성, 유희성을 발견하게 해주며, 어린이들이 나뭇가지 하나를 거대한 회오리를 불러일으키는 요술봉으로 상상하며 놀이하듯, 그렇게 배우로 하여금 ‘사물의 재발견’을 향해 나아가게끔 한다.
황혜란은 ‘뛰다’의 아카이브 된 몸으로서 ‘몸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처음에 배우가 가만히 서 있을 때 그의 몸 안에서는 엄청난 움직임들이 지각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호흡에 쓰는 근육 등 동시다발적인 수많은 역동적 인식들이 작동하고 있는 점을 재고한다. 이에 대해 당일 오후 4시에 진행된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 <확장된 현실에서의 몸의 감각, 감각의 몸>에서는, 허윤경이 ‘무용수의 정지’와 관련된 사유를 참여자들과 공유한 바 있다.
“그리고 허윤경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라 언급하며, 무대 위 무용수의 정지와 관객의 정지가 동일선상에 오는 지점에 대해 사유했다.”(조혜인, 2-3)
허윤경의 ‘몸’과 매개된 사유는 황혜란의 실험적 맥락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 허윤경은 특히 “몸들에는 무수히 다른 ‘mode’들이 존재하여, 다른 맥락에서 쓰여지는 몸에 대해 흥미를 기울였다.”(조혜인, 4) 이러한 무수히 다른 ‘모드(mode)’들은 황혜란의 조각과 조각마다 다르게 쓰여지는 모드들을 통해 관찰된다. 이어서, 황혜란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훈련의 조각을 실행한다. 팔과 손을 일(一)자로 편 채 앞-뒤로 움직이는 행위를 한다. 이것은 ‘되어지는 연기’다. 불필요한 에너지 없이 그 순간만 존재하는 어떤 인식이 그를 ‘무엇’ 하게 만드는 훈련으로 이끈다. 그는 조각마다 몸의 체계에서 다른 모드를 작동시켜 수행하고, 그 모드의 조각들을 이어 하나의 체계로 다시 이어 붙이는 재생작업을 <발표 2>에서 실험한다.
황혜란의 실연 마지막 단계에서는 ‘몸-마음’에 대해서 서로 다른 연기 이론에 대해서 소개한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따라오게 하고, 반대로 ‘메이예르홀드(Vsevolod Meyerhold)’는 하드웨어를 잘 조작하면 소프트웨어가 따라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특히’ 미하일 체홉(Michael Chekhov)’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 중간영역에서 잘 탐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기론에 대한 지평을 넓혔다. 그리고 ‘액션 씨어터(action theatre)’에 대해 언급하며, ‘컨텐츠(content)가 곧 자신이며, 컨텐츠 자체가 시공간’이라는 액션 씨어터가 구축한 이론이 그의 ‘아카이브로서의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관객들에게 질문거리를 남긴다. 기실 ‘뛰다’는 즉흥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광대연구, 바탕으로 몸-마음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배우술을 지향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황혜란이 선보인 실연은 체홉의 연기 테크닉과 잘 맞는 면이 존재한다.
체홉의 대표적 저서 『배우에게』에서는 특히 ‘심리 제스쳐 (psychological gestures)’가 강조된다. 이는 “제스처의 영향으로 의지력이 강해진다”(Chekhov, 129)라는 말로 인해, 언뜻 보면 하드웨어를 우선시하는 테크닉 같지만, 배우의 ‘창조적인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체홉은 불필요한 제약들을 거부했다.
“체홉은 배우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신뢰 받았을 때 더 특별한 작업을 해낸다고 믿었다. 체홉에게는 아이들이 배우의 패러다임이었다. 아이들은 유모 앞에서 놀이하고, 감정을 즉흥적으로 얼마든지 쉽게 불러일으키며, 자기 환상에서 생겨난 충동에 따라 형상을 바꾼다. (…) 체홉은 상상력이 모든 예술의 핵심이라고 깊이 확신하게 됐다. (…) 그에게 있어서 모든 중요한 전제조건은 ‘전체에 대한 감각’이었다. (…) 인물 안에는 씨앗이 있어서, 거기에 한 식물의 미래의 삶 전체가 담겨있다. 따라서 인물의 말 한마디 말이나, 제스처 하나를 잡아내면 인물의 나머지 전체에 접근할 수 있다. (…) “심리 제스처”의 기원이 여기 있다. (…) 연극 경험의 핵심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고, (…) ‘객석의 의지’와 필수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 관객은 배우가 사진처럼 삶의 복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 자신의 목소리와 신체, 영혼을 매개로 강렬하고 잊지 못할 창작물을 선사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영화와 텔레비전은 사실주의적인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점점 심해진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본질적으로 시적인 매체인 연극에 의지할 것이다. 연극이라는 특별한 예술 형태에는 배우-시인이 필요하다. (…) 체홉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목표가 배우-시인이라는 인간형을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체홉은 이런 천진함이 간섭 받지만 않는다면, 인간의 경험 중에서 오직 상상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날아오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Chekhov, 17-32)
체홉은 어린이 정신에 대해 제고하고, 배우에게 ‘시인’되기에 대한 의미를 제언하며, 그것이 심리 신체적인 제스처로 몸-마음이 균형 있게 표현될 가능성에 대해 저술한다. 또한 당대 러시아 연극 풍토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사실주의(realism) 연극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날카롭게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COVID-19로 동시대 연극계가 직면한 ‘연극에 대한 갈망’을 향해 그의 사유가 도달될 수 있다. 그는 연극의 본질(essence)를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황혜란’과 ‘뛰다’ 그리고 ‘체홉’의 공통점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황혜란의 조각 잇기 작업에서 체홉의 테크닉과 연극관에 대한 유사성이 관찰된 점을 제언한다. 즉, 황혜란의 작업에서도 사실주의적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탈피와, 본질에 가 닿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의 제거가 존재했으며, 이는 체홉이 배우에 대해 중시했던 주장들과 다분히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 체홉의 테크닉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고, 다시 황혜란의 작업을 규명하고자 시도하는 바이다.
양종욱이 검은 의자를 들고 등장한다. 그는 <발표 2>에서의 실연이 ‘발성’과 ‘발화’와 같은 ‘소리내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언급을 한다. 그는 “소리를 내는 행위자를 통해 듣는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어떤 생명력을 끼치는지?”에 대한 물음을 화두로 이번 실연이 진행될 점이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기실 양종욱은 ‘양손프로젝트’에서 드라마 위주의 구현 작업을 해왔다. 그러한 그가, 행위자와 관객 사이의 ‘교집합’이 멀어질 때 이것이 어떠한 관계를 창출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본 워크룸을 통해 수행한다. 그는 소설 『데미안』[2]의 조각 이어 붙이기를 시도한다. 과연 소설의 조각들이 어떻게 소리의 발화 실험과 만나서 관객들과 멀어지는 교집합을 생성할까?
필자는 <발표 2>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양종욱의 솔로 실연 영상 <발표 1>을 보았음을 주지시킨다. <발표 1> 영상(이하: <발표 1>은 그가 자신의 SNS를 통해 작업에 대한 사유를 간략히 공유하며, 공개해 놓은 그의 e-mail을 통해 개인적으로 연락이 온 사람들에게 전송한 영상이다. <발표 1>에서 그의 포커스는 아래와 같다. “말을 ‘발(發)’하는 것”의 힘 그리고 발성과 발화의 힘이 행위자에게 어떠한 ‘생명력’을 발생시키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에 주목함이다. 소설 한 편에서 청각적 요소들을 수집했고,[3] 행위자가 소설을 경험하는 과정으로서 발표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본 워크룸 <발표 2>는 <발표 1>의 연장선상으로서,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실 <발표 1>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은 완결된 공연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 1>에서는 특정 인상과 새로운 질문들이 생성된다. 한 남자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신비감, 고통과 속박의 몸부림, 그리고 다른 함정으로 빠질 수 있는 덫과 모종의 거래, 세계에서 벌어지는 난장 등이 발성과 행위자의 몸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으며 ‘뭉크(Edvard Munch)의 화화적 인상’을 창출한다. 요컨대, <발표 1>에서 드러나는 양종욱의 행위는 ‘행위자의 소리에 대한 인상주의적(impressionism) 실험에 가까운 창작 테크닉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화가가 순간의 빛을 포착해서 화폭에 담아 내듯, 양종욱이 소설을 통해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소리를 포착했던 점과, 이를 점묘법(pointage)처럼 조각, 조각마다 쪼개어 표현한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지점은, <발표 2>는 행위자의 행위가 <발표 1>과는 다른 양상을 띈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발표 2>에서 양종욱은 의도적으로 행위자의 변화를 창조했다. <발표 1>의 경우에는 소리의 발성, 발화와 함께 얼굴의 표정근육, 몸의 개방 및 움직임들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지점이 포착된다. 즉, 일정부분 드라마적 연기 요소가 가미되며 행위자가 감정을 더욱 자유롭게 표현한다. 그러나, <발표 2>에서는 그와 반대적 양상을 띈다. <발표 1>보다 절제된 표정과 동작을 통해 감정이 대폭적으로 축소되었다. 연기의 양상이 ‘탈-드라마적’이며, 행위자가 소리내는 행위와 소리가 지닌 그 자체의 물성(物性)을 감각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한 ‘overall controlled-setting’이 두드러졌다. 그러므로 양종욱의 <발표 1>과 <발표 2>를 모두 감상한 필자로 하여금 ‘소리 및 발화의 탐색과정에서 행위자가 감정표현을 얼마만큼의 퍼센테이지(percentage)로 담아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유도한다. 그렇다면 양종욱은 <발표 2>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수행하였는가?
그는 목관악기와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해서 모깃소리로 끝나는 듯한 그 ‘사이’의 음역대를 창출해보기도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거대한 ‘풍차’를 상상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또한 그는 “77개의 그림책 속을 걸어가며 소리를 통해 데미안과 만나고 있다”는 점을 통해 그 조각들이 ‘데미안을 향한 여정’임을 사유한다. 그리고 나서, ‘행위자가 경험한 데미안’과 ‘관객이 경험한 데미안’의 교집합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사이에 ‘출렁이는 부분’이 있음을 사유한다.
이는 모든 실연이 끝난 뒤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더욱 깊은 이야기로 진전된다. 양종욱과 황혜란이 등장하자 사유가 파릇파릇 피어난 관객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 2는 객석에서 보이는 디스이즈낫어처치의 십자형태의 기둥을 가운데 0을 기준으로 상하좌우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x, y축을 가진 그래프로 비유하며, 행위자의 발화-움직임을 네거티브/포지티브(가로축) 그리고 높음/낮음(세로축)으로 바라보았음을 밝혔다. 그리고 관객1의 경우 전체적인 형식의 측면 즉, ‘이것이 공연인가, 발표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여기에 부응하여 관객 2는 본 워크룸이 ‘학술적 발표’의 느낌을 갖는 측면이 있음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삼일로창고극장의 기획공연 <퍼포논문>의 예를 들면서, 렉쳐-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형식의 <퍼포논문>에서 ‘공연’이 되게 하는 장치들─조명, 무대 디자인, 오브제 등─을 제거하면 반대로 ‘학술적 발표’에 가까워질 수 있는 점을 제기하였다. 요컨대, 관객들에게 <발표 2>도 <퍼포논문>의 사유를 역으로 적용하는 맥락에서 사유 해보길 제언하며, 본 워크룸에서 “공연이 아닌 무언가의 ‘사이’들의 과정으로 상정한 <발표 2>에서 ‘공연’다운 것들이 갖추어 질 때 과연 이것은 ‘공연’이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성했다. 이는 “공연이라는 형식은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정하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또한, 양종욱이 언급했던 ‘교집합이 멀어지는 순간’과 ‘출렁이는 부분’에 대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이를 ‘놀이기구’에 비유를 시도했다. 드라마극의 경우에는 놀이기구의 탑승자들이 안전벨트에 다 묶여 있는 상태다. 공유하는 장치 및 세계가 모두에게 안전하게 주어지고, 조작자가 시작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탑승자들은 놀이기구의 흐름을 타고 흘러간다. 결말, 즉 놀이기구에서 무탈하게 하차할 것이라는 믿음을 모두 가정한 채 말이다. 그러나 본 워크룸에서 시도된 양종욱의 ‘탈-드라마’적 행위 양상의 경우에는 안전벨트 없이 시작된 놀이기구에 매달린 탑승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놀이기구의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매달리려 한다.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위험 천만 하게 떨어질 것 같은 순간에, 어떻게 해서라도 놀이기구를 부여잡으려고 애쓴다. 즉, 관객은 행위자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 개별적 이미지나 감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관객의 전환(transformation)이요, 관객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촉발시키게 한다.
양종욱과 황혜란은 저마다 작업을 통해 느낀 점을 공유하며 본 워크룸과 <관객과의 대화>를 마무리한다. 양종욱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배우다. 배우를 ‘통로(path)’에 비유하며, 배우는 통로로서, 통로를 보여주는 것임을 사유한다. 그리고 황혜란은 ‘조각들을 통해 무언가 보여 졌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이처럼 <발표 2>는 결국, ‘볼 때’ 어떤 일로 보여지고, ‘할 때’ 어떤 일로 행해지는지를 추적해가는 과정으로서 관객들 가운데 ‘스스로 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능동적 사유를 창출한 장(場)이기도 하다. 이러한 능동적 사유의 시간들이 앞으로도 계속 펼쳐지기를 바란다. 비록 완결된 공연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 형식이 ‘형식’과 ‘형식’ 어느 사이에 있을지라도, 관객의 사유를 뒤집어가는 실험들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마치 황혜란이 ‘광대’를 오롯이 만날 수 있었던 순간처럼 그리고 양종욱이 소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며 데미안을 만나는 여정처럼 말이다.
[1] 양종욱은 자신의 개인 SNS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올해 2월에 황혜란배우와 함께 하는 작업의 일부로 작은 발표를 했습니다. '발성과 발화의 행위가 가진 힘'과 '퍼포머와 관객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기반으로 진행된 실연이었습니다. 30분 분량의 이 실연영상을 공유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양종욱의 솔로 영상 입니다) 영상을 공유받고 싶다면 저에게 메일을 보내주세요. 그러면 메일로 영상을 보내드릴께요. (저와 모르는 사이라면 아주 간략한 소개만 해주신다면!) 영상을 보시고 인상 내지는 생각들을 글로(혹은 그밖의 무엇이든) 저에게 피드백을 주시면 됩니다. 피드백은 필수입니다. 피드백을 보내주시면 그에 대한 응답은 다시 메일로 전하겠습니다. 피드백에 대한 요청과 질문은 영상을 보내면서 함께 전하겠습니다. 동료작업자들과 대화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을 발견해보려고 합니다.” 현재 양종욱의 솔로 영상 전송은 마감되었다. 양종욱, <마감되었습니다.>, 페이스북, 2021-06-17,
https://www.facebook.com/jongook.yang
[2]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작, 1919 출판. 『데미안』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3] 양종욱은 <발표 1> 영상에서 그 ‘소설’이 『데미안』인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조혜인, 제 20회 서울변방연극제 토크 참여 후기: 연극은 인간이란 생물이 하기에 -<확장된 현실에서의 몸의 감각, 감각의 몸>을 중심으로-, 서울변방연극제, 2021-07-08 작성, 1-8쪽.
Chekhob, Michael 저, 김선, 문혜인 옮김,『배우에게』, 도서출판 동인, 2020, 1-308쪽.
양종욱, <황혜란 배우와 작은 발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2021-02-16, https://www.facebook.com/jongook.yang
양종욱, <마감되었습니다.>, 페이스북, 2021-06-17, https://www.facebook.com/jongook.yanghttps://www.facebook.com/jongook.yang
양종욱, <발표1_양종욱>, 양종욱 솔로 발표영상, 0:30:03, 2021-02-24 혹은 2021-02-25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