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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영 Oct 07. 2021

10월 7일, 아빠에게

아빠. 편지가 진짜 뜸했다. 그지. 아빠한테 편지를 쓰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한동안은 아니었어. 편지는 손이 아니라 마음이 쓰는 거니까 아빠에게 향하는 마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저녁 그 마음이 도착한 거야.


어제까진 쫄리는 마음이 좀 컸어. 나 지금 제주에 있잖아. 아빠한테 언제 갔다가 언제 돌아온다고 이야기도 안 하고 새벽에 출발해버려서 마음이 좀 무거웠어. 실은 지금도 좀 무거워. 집에 들어가면 어떤 말로 나를 반겨(?) 줄까 약간 두렵기도 해. 처음 며칠은 잘 갔다 오라거나, 언제 오느냐는 메시지가 도착하진 않을까 기다렸어. 알람이 잠잠하더라. 지난주 화요일에 제주도에 왔을 땐 "have a nice day"라며 카톡을 보냈잖아. 화요일에 떠나서 금요일에 돌아온 딸이 며칠 만에 다시 제주로 간다니, 아빠 많이 당황했을 것 같아.


따지자면 이번 제주행은 여행보다는 가출에 가까운 거였지. 아빠는 정말 가냐고 물어봤고, 나는 대충 얼버무렸어. 새벽 비행기라고 선명하게 말했으면 아빠가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줬겠지. 분명 그랬겠지 하면서 택시를 타고 정류장으로 갔다. 새벽 공기가 차더라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이렇게 집을 나와버려도 되는 건가,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보라는데 심지어 나는 비행기표를 끊어버린 거니까 제주에 가는 수밖에 없었지.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굳이 꼽자면 나랑 막역한 선생님이 제주에   동안 머무르고 계시다는 이유가 있겠네. 보러  사람이 없었다면  가을에 이리도  섬에 밀려 도착할 일도 없었을 거야. 어렸을 때도  했던 가출을 이제야 하다니. 사춘기가 늦게  건가, 반항기라고 해야 할까. 아빠가 보기에 지금 나는 어때?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요즘 내가 자주 하고 있잖아. 갑자기 대학원을 그만두겠다거나, 제주에 가겠다거나.


갑자기 왔지만 그래도 아빠. 나 여기서 엄청 잘 지내. 첨벙첨벙 물에 들어가서 눈이 반으로 접히고 광대가 계란만 해질 때까지 껄껄 웃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모래사장에 누워서 마스크를 이마까지 올려두고 태양에게 "어디 한 번 나를 태워봐라"하고 말을 걸어보기도 해. 밥도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꼬박 잘 챙겨 먹고 있어. 오늘은 선생님이 아침으로 감자 요리를 해주셨는데 진짜 맛있었다. 아빠도 감자 요리라면 최곤데, 그에 비할 만큼 맛이 좋았어.


머무르는 곳은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어서 해질 무렵에는 창 밖으로 노을도 봐. 언젠가 아빠에게 베란다 쪽으로 난 창을 가리키면서 지금 저기 하늘의 색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지. 여전히 여름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의 저녁 하늘에는 라일락 빛깔이 돌아. 해가 지는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선생님이랑 무작정 집을 나서서 하늘 쪽으로 뛰어갔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뜰 때마다 하늘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웠어.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리도 빨리 사라지는 걸까.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걸까?


이런 말은 아빠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려나. 그나저나 아빠, 화난 건 아니지? 오빠는 아니라는데 혹시나 나로 인해 잠을 설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된다. 걱정은 내가 많이 하고 있으니까 아빠는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그저 편안하게 이 밤 보내기를 기도해. 아빠 내가 쭈뼛쭈뼛 집에 들어갈 건데, 여느 때와 같은 웃음으로 나를 맞아줘야 해. 알았지?


쪼그라드는 마음을 곱게 펴보며,

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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