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을 다닐 때 화장하는 걸 좋아했다. 아이라인, 아이쉐도우에 마스카라까지 나름 풀메이크업을 했고 매니큐어도 바르며 나를 꾸미는 것이 재미있었다. 첫 수업이 1교시에 있으면 일찍 일어나 화장하는데만 2시간을 공들여했다. 아침밥은 못 먹고 갈지언정 반드시 화장을 해야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생활의 중심은 자연스레 아이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늘 아이를 안고 얼굴을 맞대다 보니 화장도 할 수 없고 좋아했던 귀고리도 할 수 없었다. 아름이가 아기였을 때 나는 전처럼 귀고리를 하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손으로 귀고리를 자꾸 잡아채서 결국 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이힐 신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하이힐을 신고 아이를 안으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늘 운동화나 굽 낮은 신발을 신어야만 했다. 아이는 음식을 먹을 때 늘 옷에 흘리게 되고 입과 손에 묻히니 늘 아이와 함께 있는 내 옷 또한 음식물에, 아이 침에,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빨래하기 쉬운 티와 바지를 주로 입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에게 맞춰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에게 엄마로서 내가 놀아주거나 가르치는 데에도 한계를 느꼈다.
결혼 초에는 남편 혼자 벌어 생활을 했던 때라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었다. 물론 아이에게 모든 걸 다 해주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달라지는 아름이를 보면 늘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름이가 다니게 된 문화센터에서 한 엄마를 만나고부터 나는 엄마로서 지금 이 시기에 아이를 위해 더 많은 경험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이와 같은 문화센터 수업을 듣는 아이의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문화센터 다니는 날만 회사에 반차를 쓰고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에 왔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친해졌다. 일을 하며 육아를 하는 엄마라 굉장히 바쁘고 힘들 텐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아이를 대하는 것을 보며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문화센터 수업에서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시간이 될 때마다 자주 만나 아이들도 함께 놀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아기에게 책을 사주고, 교육비에 투자하는 것을 보며 아름이에게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생활비는 아낀다고 아껴지지 않았다. 옷을 사도 항상 남편 옷과 아이 옷만 샀다. 남편이 마트에 가서 뭘 사자고 하면 늘 "안돼."라는 말부터 먼저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아이였지만 조금씩 지쳐갔다. 아이에게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뭔가 더 못해주어 답답하기도 했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또한 우울했다. 항상 아이와 함께 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으로 놀러 갔는데 아빠가 말씀하셨다.
“올해 서울시에서 공무원을 많이 뽑는다.”
아빠는 전부터 여자 직장으로 공무원이 괜찮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그때는 아빠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은 아이를 키우면서 정시퇴근을 한다고 알았던 공무원만 한 직업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공무원 시험 보는 날짜를 바로 알아보았다. 학원에 다니려고 하니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나 혼자 집에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아름이가 말을 할 줄 알아 웬만한 건 다 표현을 할 수 있으니 어린이집에 보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다.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을 몇 군데 알아보고 직접 아름이랑 가 보았다. 집보다 장난감도 많고 친구들도 많은 어린이집에 가자 아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어린이집에서 더 놀겠다고 떼를 썼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잘 놀아주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해서 그런지 친절한 선생님이 하는 말씀을 잘 따랐다. 첫인상이 좋았고, 무엇보다 말투가 나긋나긋하신 원장 선생님을 믿고 다음 달부터 그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며 아름이는 동요를 배워와 집에서 부르며 노래에 맞춰 율동도 따라 추었다. 나는 아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이래서 교육기관에 아이들을 보내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이는 그렇게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서 즐겁게 다녔다. 덕분에 나는 조금은 걱정을 덜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공부를 다시 하려고 하니 마음과 달리 앉아 있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는 공부하는 만큼 꾸준히 해나가려고 자꾸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아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5시간 동안만 공부를 하려니 금방 앉아 있었나 싶었는데 다시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야 해서 공부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는 집에 오면 나랑 놀고 싶어 했다. 아침에 공부한 내용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아이에게도, 공부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공부를 한다고 아름이를 방치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린이집이 끝나고 일주일에 두 번을 시간을 내서 아름이를 재미있게 놀게 해 주려고 어린이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린이집을 보내고, 일주일에 두 번씩 아름이를 데리고 수영장을 다녀온 후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이고 씻겨 책을 3권 읽어주고 잠을 재웠다. 생각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가시자 공부도 진도를 나갈 수 있었고 아름이도 즐겁게 잘 지내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합격할 정도로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다. 시험을 치르면 안타깝게도 점수가 합격 커트라인보다 늘 1~2점이 모자랐다. 공부에 조금만 더 집중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아름이를 반일반에서 종일반으로 옮기고 좀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터넷 강의로만은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은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주말에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하루에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10시간 정도 확보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공부를 했다.
저녁에 집으로 오면 얼른 아름이를 저녁을 먹여 재우고 오늘 할 분량의 공부를 마저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공부로 예민해져서인지 밤에 아름이를 재우고 나오면 금방 깨서 ‘엄마~’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재우고 나면 30분 자다 말고 깨어나기 일쑤였다. 어쩌다 일찍 들어온 남편이 나 대신 아름이를 재워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름이는 평일에 바쁜 아빠를 자주 보지 못해서인지 잠을 잘 때 아빠가 안아주면 ‘아빠, 싫어! 저리 가!’라고 울어서 남편이 굉장히 속상해한 적이 있다.
3달 정도 함께 공부하던 스터디 모임에서 한 명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축하한다고 말은 했지만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1년이 지나면서 내가 좀 더 공부시간을 늘려야겠다고 말했을 때 반기지 않았었다.
‘나는 네가 뭔가 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공부하라 그런 거지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라고 그런 거 아니야.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는 아이를 위해 취직을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취직하겠다고 아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나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종일반으로 옮겼다. 그리고 하원해 집에 온 아이를 저녁만 겨우 먹이고 다시 잠만 재웠다. 이런 내가 싫었다. 어떻게든 올해에는 합격을 해서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는 아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엄마가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라고 얘기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내년까지 이렇게 다시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스터디 모임에서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유일하게 아이 얘기를 하는 친구와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날이다. 습도가 높아지며 더워진 여름, 그날따라 화장실 바닥이 지저분해 보여 눈에 거슬렸다. 아름이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신발을 신기보다 맨발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아이가 맨 발로 들어가도 되게 화장실 바닥은 항상 뜨거운 물로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날도 뜨거운 물을 틀고 바닥을 솔로 열심히 문질러 청소했더니 날이 더워서인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시계를 보며 친구와 약속한 시간에 맞춰 가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까지 급하게 뛰어갔다. 마침 역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다행히 탈 수 있었다. 한 정거장을 타고 환승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주변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천정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듯 느껴졌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급하게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와서 힘들어 그런가 싶어 천천히 걸었다. 겨우겨우 계단을 올라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러다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에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 집 근처에 있는 한의원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엄마가 더울 때 공부하기 힘든데 한약을 지어준다고 하셨다. 엄마에게 미안해서 괜찮다며 한약을 안 먹어도 튼튼하다고 말했었다. 엄마가 해준 말씀이 생각나 한의원에 들렀다 축 처진 몸으로 친정으로 향했다.
엄마는 시원하게 선풍기를 틀어주면서 날이 덥고 습하면 몸이 더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그날만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날이 연일 더워지자 밖을 나가기가 두려웠다. 숨이 막힐 듯한 느낌도 무서웠고 이렇게 죽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접수해 놓은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밤에 자다가 다시 숨이 막혀왔다. 그 와중에도 자는 아이를 깨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급하게 아빠에게 새벽에 전화를 드렸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응급실로 데리고 가셨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도저히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었다. 아빠는 괜찮다며 안심시키며 나와 함께 계단으로 올라가 주셨다. 응급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나의 심장박동을 체크하더니 내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며 조그만 알약 하나를 처방해 주었다.
그 다음날 아빠는 병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 그동안 열심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으니 이번에 응시하려는 시험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도 아빠와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시험 당일 직접 운전해서 시험장에 나를 데려다주셨다. 혹시라도 또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뛰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내가 앉은자리로 선풍기 바람이 불어서 견딜 만했다. 평소대로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터덜터덜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아빠는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시험장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아빠는 “애썼다.”라는 한마디를 건네고 나를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셨다.
그 날로 나는 취직을 위해 해왔던 공부를 마음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 모두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가 몰려오면서 나는 우울증이 생겼다. 아름이를 아침에 어린이집에 보내고 거실에 앉아 잘 웃지도 않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그저 에어컨을 켜고 집에 있었다. 전에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숨넘어가도록 웃는 남편을 보고 그게 그렇게 웃기냐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남편이 부러웠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눈물이 났다.
2018년 미국의 학술지 ‘아동발달’(Child Development) 4월호에 실린 연구결과에서 UC샌디에이고 의대 소아과 패트리샤 이스트 박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어머니들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어머니들에 비해 자녀들에게 적당하게 감정 표현을 하거나 장난감이나 책과 같은 자녀들을 위한 학습 재료들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연구결과대로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랑 잘 놀아주지도 못하고, 전처럼 꾸준히 책을 읽어주지도 않았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여 어린이집을 보내고 아이가 종일반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오면 저녁을 먹이고 재우기만 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조금 살 것 같긴 했지만 아직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날 아이가 종일반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문득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아름이에게 약속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밥을 먹다 말고 아름이에게 말했다.
“아름아, 엄마가 전에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하면 맛있는 것 사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제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름이는 울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울지 마! 지금은 울어야 할 때가 아니야. 더 열심히 해야 할 때야.”
아이가 한 말에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제 겨우 5살밖에 안 된 아이가 엄마인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갑자기 훌훌 털고 일어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