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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y 09. 2018

다들 그렇게 살아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간다는 것




결혼을 앞둔 친한 친구가 있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되어버린 친구는 기쁜 일을 앞두고도 마음이 매우 조급해져 있었다.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과 육아라는 틀에 박힌 기혼여성의 삶이 그녀를 압박하는 탓이었다.

출산하기에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불안감, 임신이 잘 안되면 어쩌나 싶은 막연한 걱정 등 이 사회가 여성에게 부가하는 역할론의 늪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다.


나 역시 삼십 대 초반까지 싱글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해 왔었기에 그녀가 받는 압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지 알고 있기에 결혼을 늦추고 인생을 더 즐기란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대신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너의 예상과 짐작보다 적어도 열 배는 더 힘들 거야.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니 마음 단단히 먹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역할이라는 것이 부여된다.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자녀로만 존재하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학생이라는 역할을 갖게 되고, 그 뒤로부터 다양한 역할 속에서 조금씩 서로 다른 나를 만들어가며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점점 나의 색깔을 찾아가면서 ‘나’라는 자아를 정립해가는 것이 인생의 한 줄기라 생각한다.


삼십 대 중반의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졌던 사회적 역할은 꽤나 많았었다. 하지만 결혼 후, 요즘처럼 나를 방랑하게 하는 역할은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은 참 진부하다. 결혼에 대한 모든 경험자들의 얘기가 참 진부하다 생각했는데, 나 역시 그들이 내뱉던 얘기를 똑같이 하곤 하는 진부한 경험자가 되어 버렸다.


1년 전, 결혼과 동시에 모든 것을 끊고 가정주부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대부분인 나날이 이어졌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있었었다. 그리고 그저 막연하게 모두가 해 내니 나 역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안정감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꾸린 다음 평범하고 소소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는 것, 당연히 그런 나날이 준비되어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삶은 내 기대와는 다소 다르게 펼쳐졌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바삐 움직이고 쉼 없이 버텨야 하는 일들이었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처럼, 발을 쉼 없이 움직여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해보기 전엔 몰랐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아왔던 삶이기에 이토록 치열해야 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혼자일 때의 평범하고 소소했던 행복은 정말 드물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행복이 되었고, 남편과 아이의 만족을 보며 안도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물론 그것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때론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모두들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 생각했기에 나의 피로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엄마는 만능이어야 한다는 말이 딱 맞다. 아픈 것도 지치는 것도 엄마에겐 사치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온통 남편을 위하고 아이를 챙겨야 하는 것이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라니. 대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서 해야만 하는 일들에 치여 나 자신은 자꾸만 뒤로 밀려났고, 그렇게 나를 잃은 나는 빈 허공을 떠다니는 방랑자가 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


요즘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니. 왜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그리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왜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 역시도 누군가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저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안을 찾기가 어려운 일방통행 길이 바로 이 길이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선택하기 쉽지 않은 차선책이기에 차마 권할 수는 없는 없다. 엄청난 책임이 뒤따르는 선택. 이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결혼은 신중하라 했었나 보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어쩐지 낯설어졌다.  


혼자 보던 심야영화도, 카페에서의 독서도, 비 오는 날의 산책도, 훌쩍 떠나던 여행도 지금은 남의 얘기인 것만 같다.


누군가의 아내와 누군가의 엄마로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들 또한 나중에는 한 사람으로서의 나에게 소중한 시간들 일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내 선택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나 자신을 챙겨야 할 것 같다.


쳇바퀴 굴리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쉼표를 찍고 있는 지금, 원래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다시금 심호흡을 크게 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그 친구에게도 꼭 말해주고 싶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결코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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