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을 뒤적이다 오금이 저린 제목을 보고 기겁을 했다. 손금으로 내 죽는 나이를 아는 법이라니. 아무리 휴우머로 올린 글이라고 해도 제목만 봐도 가슴이 철렁 가라앉아 어떻게 손금으로 내 죽은 나이를 점쳐 본다는 것인지 들어가서 글을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아 마우스 휠을 황급히 내려 버렸다. 언젠가부터 '죽음'이라는 단어 옆에는 두려움이 따라붙는다. 그 감정은 나와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2021년 찬란한 햇살이 맑았던 봄날의 어느 날 큰 고모와 큰 아버지가 일주일 차이를 두고 돌아가신 뒤부터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볼 때면 어느새 두려움은 내 머리와 가슴으로 날아와 비수처럼 꽂혀버리게 된 것이었다.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듯 부모님이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가시는 게 여느 때 보다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요즘.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보면 엄마의 얼굴보다 어느새 부쩍 늘어버린 엄마의 흰 머리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란도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다 고개를 들어보면 유난히 밝은 형광등에 아빠의 움푹 패인 주름들이 유난히 짙어 보인다. 뽀얗기만 했던 엄마의 팔엔 어느새 울긋불긋 검버섯들이 줄을 서 있고, 아빠 눈썹은 만화에 나오는 호랑이 영감님처럼 더더더 하늘을 향해 삐죽 솟아난다. 요즘은 부모님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또다시 반복하며 부모님의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올해 엄마, 아빠와 나는 이른 여름 주말을 이용해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산과 강이 보고 싶어 떠난 홍천 여행에서 굽이진 강줄기 사이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홍천강 야영장을 만났다. 캠핑 의자에 몸을 맡기고 물을 첨벙 대며 발장난을 치다 엄마는 아빠를 나지막이 불렀다. "여보~ 나 발톱 좀 봐~ 얘는 벌써 죽어버렸어. 여보는 어때?" "나도 그래~ 까맣게 다 죽어버렸지 뭐." "참 신기하지.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몸이 변해 간다는 게" 부모님은 죽은 발톱을 보며 익숙하다는 듯 한참을 나이를 먹어가며 생기는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셨다. 한 발치 뒤에서 그 얘기를 듣게 된 나는 까무러치듯 놀라며 부모님께 다가갔다. "뭐어~? 발톱이 죽어? 어떻게?" 검버섯이라던가, 늘어난 주름 같은 것은 눈에 자주 띄었어도 부모님의 발톱을 자세히 보게 된 건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매끈한 내 발톱과 다르게 엄마의 발톱은 쪼그라들거나 우둘투둘 세월의 나이테가 많이 생겨있었다. 아빠의 세 번째 발톱은 창백하게 누워있는 고인의 모습처럼 생명을 잃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아빠는 그 발톱을 죽은 발톱이라고 했다. 문에 끼이거나 큰 충격을 받아 치이거나 큰 사고 없이 발톱의 안부는 무탈했음에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톱도 명을 다하는 순간이 오는구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몸의 변화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깜짝 놀랐던 나처럼, 슬슬 몸의 변화들이 눈에 띄게 하나씩 보이게 됐을 때, 그때 그 처음엔 엄마도, 아빠도 지금의 나처럼 깜짝 놀라셨었겠지.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발톱과 함께 6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발톱과 익숙해지며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는 증거려니 하고 어딘가 속상하고 서글픈 마음을 삼켜버리셨던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언젠가 내가 육십이라는 나이를 바라보게 될 때를 나도 모르게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아닌 내가 낳은 자식들과 함께 간 계곡 어딘가에서 발을 첨벙이다 우연히 내 발톱을 바라보게 됐을 때, 내 발톱이 점점 쪼그라들거나 부서지거나 까맣게 변하기 시작하는 그때, 그때서야 엄마 아빠 얼굴을 천천히 떠올려 보며 알게 되겠지. 아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때 죽은 발톱을 바라보며 이제 몸이 성한 데가 없다고 말씀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겠구나. 하고. 그때가 되면 나도 엄마, 아빠가 얘기해주신 것처럼 자녀들에게 내 죽은 발톱을 보여줘야지.
"이건 엄마의 죽은 발톱이야. 신기하지. 너만 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은 발톱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는데 엄마도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