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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맞서게 되던 날

청춘이었다.

by 솔바람

염세적이야, 하늘은 파랗고 해맑아도 내가 머문 자리는 고개를 숙이지. 시를 쓰는 예술적인 표현은 고뇌에서 오는 아름다움이야. 예술을 위해 오늘의 순수는 지키고, 고집은 외톨이가 되어 술 한잔하며 세상을 바라볼 뿐 그 이상도 아니지. 부조리한 세상 언저리를 기우뚱하며 존재할 수 없는 내면의 부적절한 폭력을 피하는 거지. 무서운 것은 피하고, 두려운 것도 가차 없이 숨기면서 사는 거지. 그러다 시인 이상이 되고, 시인 이성부가 되며, 시인 오규원이 되어 날개를 허공에 대고 펄럭이는 것이지. 천재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등거리며 어설프게 시를 쓰려고 고백하는 거지.



이토록 어설프게 부산에 착륙했어. 말 그대로 시를 쓰려고, 그런데 그러는 사이 알게 되었지. 시를 몸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눈을 뜰 수 없었던 시절이다. 치약으로 눈 아래를 칠하고 물로 씻어내도 최루탄 연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부로 눈으로 콧속으로 스며 들었다. 얼굴은 붓고 목이 쉬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얼굴을 향해, 발밑으로 지랄맞게 죽음의 연기를 뿜어내며 연일 우리를 향해 쏟아붓는 폭력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슴이 저미고 서글펐다.

슬프고, 분노에 찬 하루를 보내다 보면 그 순간이 무섭기보다는 나가서 외치지 않고서는 잠 들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거리를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심장에서 그대로 꽃으로 핀다.


너무 젊고 억울한 붉은 피들이 이 땅을 물들게 했고, 그 혼들은 갈 곳을 잃어버렸다. 육신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무력하게 놓아야 하는


고통, 너머,

그들의 혼은 자신의 명줄이 느닷없이 끊어진 것을 하염없이 원통해 했을 뿐,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도, 하늘로도 가지 못했다. 그저 이 땅에 이 시대에 남아 나에게 온 것 같다.


어쩌면 이 시대는 우리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싫어하는지 모른다. 내가 머물렀던 시절, 통학버스를 탄 사람이 너무 많아 그곳을 비집고 설 자리를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시작했던 시간을, 때론 친구들과 핫도그에 빨간 케첩을 발라 먹으며 시시껄렁한 수다로 이어졌던 일상을,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며 첫사랑을 수줍게 이야기하면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춘기는 때로는 싱겁고, 때로는 순진하게 기억되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 채 오늘을 맞이했다.




메케한 냄새가 나는 짙은 국방색 군 담요로 창을 가리자 작은 공간은 대낮임에도 곧, 어두워졌다. 지~찍~찍

복사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비디오는 작은 TV 안에서 특~ 철커~덕 소리와 함께 불협화음이 먼저 우리를 끌어당긴다. 하얗고, 검은 눈동자들이 화면을 똑바로 보지도,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 채 목에 메인 울음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군홧발에 짓이긴 채 질질 끌려가는 학생들, 군경들의 진압봉이 사람들의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고 그곳에서 붉고 짙은 피들이 무참하게 흩어진다. 팬티차림으로 두 팔을 머리 뒤로 한 채 끌려가는 이곳이 참혹한 학살의 현장이다.



그날의 악몽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곁에 있는 동지들은 닳고 닳아 밑창이 다 떨어진 구두를 신은 채 동분서주하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안은 기댈 곳을 찾아 불나비가 되었다. 그렇게 4만 명이 넘는 시민 안에 내가 서 있고, 해방구를 맞이한 범내골 로터리는 평화를 향한 행진으로 가득했다.

부산역은 기차 소리조차 뜨거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볕이 음지의 습기를 사라지게 하듯

부산의 6월은 뜨겁다.


육교 위에 사람들이 육교 아래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환호한다. 덩달아, 내 숨결은 어느새 정의롭고 아름답다.


환대가 지극해서 이 함성이 곧바로 군부독재가 사라질 것 같다.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내가 가는 그곳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청년인 나는, 기독교인인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지금 여기에 서 있으며 낮은 곳으로, 가난한 자 편에서 어떤 권력보다 민중들의 편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부활하신다.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며, 나의 내면이 자라나는 것을 봤다. 이 땅에 인간 존엄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공장의 불빛을 밝히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 여겼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당당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했다.

오늘 이곳으로 오게 나의 십자가를 사랑했으며 나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는 고문이 어떤 것인지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채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그 해 1987년 1월의 하늘을 지나면서, 공포라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서부터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스물서너 살쯤의 하늘, 그 하늘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끔찍하고 아팠다.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하면 어떤 것도 법에 따라 민주적인 절차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나이에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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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에서 나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자그맣고 보잘것없는 그 교회가 나의 성지가 되었다. 한걸음 말씀을 실천한다는 거창한 목소리를 내면서 선배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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