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무궁화호 밤 기차를 탔다. 11시에 부산으로 떠나는 열차는 사뭇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4시쯤이니 얼추 맞을 것 같다. 기차는 느리게 밤새 철도 위를 달렸다. 무의식 속에서 잠이 들었고, 아마도 몸 안으로 쑥 들어온 비릿한 바다 냄새가 흔들어 깨웠는지 모른다.
미역이 파도에 휩쓸려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어설프게 바다와 육지의 어중간한 자리에서 썩어가면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었다 알리는 듯, 시간과 공간은 분명 부산역이다. 그런데 그 비릿한 냄새가 과연, 미역이었을까? 어쨌거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몸을 깨운 것은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역겨울 정도의 비릿함이. 그것은 폐를 통과하여 나의 뇌를 자극했다.
‘아, 부산이구나.’
도저히 처음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그 비릿함에 아찔하다. 아직은 순결하다고 할 정도로 밋밋한 몸이 약간은 경망스럽게 떨려 닭살 같은 소름이 쫙 끼친다.
사람이 인연을 만들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사소한 것으로도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비릿한 바다 냄새 하나로 낯선 도시, 부산이 좋았다. 낯설디낯선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비릿한 바다는 낯선 도시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해 주듯 코끝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불편한 무궁화호 의자에서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비스듬히 몸이 구부려진 채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세상모르게 잠들었든지 머리카락은 부스스했다. 후다닥 거울을 찾아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어쩐지 창피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망설이면서 빗을 챙겨 빗질을 시작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기차 안은 종착역이라 먼저 앞서서 내리는 사람, 뒷발을 올려 짐칸에서 짐을 꺼내는 사람, 자는 아이를 깨우는 사람 등 서먹한 소란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밥상에서 함께 숟가락을 얹어서 밥을 먹는 사이처럼 모두 한순간은 똑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 기차 한 칸에 있는 사람들은 새벽 4시가 주는 신비한 새벽의 기운을 잠시나마 공감한 것 같다. 빗질하던 머릿결을 한 번 쓰윽 내리고 짐을 챙겼다.
낯선 이 기차에서 내려가는 짧은 계단을 한 칸 내디딜 때 마다 몹시도 떨렸다. 앳된 모습 그대로 얼굴에는 홍조까지 엷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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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왔네...”
씁쓸하게 혼잣말로 되뇌면서,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어깨에는 오래된 누런 배낭이 무겁게 매달려 더 외로워 보였다. 이런 누런 배낭을 찾아낸 것도 신기하다. 다락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찾다 보니 그래도 쓸만한 것이라곤 딱하나 건진 것이다.
부산역은 그렇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고, 배낭은 한없이 무거워 보인 채 끙끙대는 새벽 사냥개처럼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이제 보이는 건 무엇이든 간에 낯설고 낯설다.
부산역 건너편 새벽 4시, 여인숙 방 한 칸을 빌러 쪽잠을 자고 무서워 떨면서 아침이 되기를 원했다. 이런 정말 겁도 없는 행동에 눈이 저절로 떠지면서 다시 그곳을 빠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갈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141번 버스에 올라탔다. 귀신에 씐 것일까? 하염없이 낯설고, 두려운 길을 가다가 내린 곳에서 그만, 멈추었다.
하늘과 산과 바다와 그리고 한적함이 그대로 존재하는 곳에 다 닿았다.
발길은 멈추고, 나의 내면은 그곳의 햇살을 느꼈다.
소설을 쓰듯, 멈추고 짐을 풀었다.
" 괜찮아, 오늘, 참 잘했어. 이곳은 청사포야."
멈춘 자리에서 해운대 미포 아랫동네를 걸어갈 때면 옆 기찻길도 하늘거리는 하늘 자락도 건드려 본다. 그러다 한참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바닷가 해변이 나온다. 철 지난 바닷가는 파도를 토해내듯 외로움을 토해내고 있다. 한사코 사라지길 싫어하는 포말은 끝내 새로운 것에 무너져 내린다.
하얀 거품이 한순간 사라지는 거다. 발끝에 달랑 말랑했던 그 간질거림이 허상이 되어 버리고, 또 다른 파도를 맞이한다.
그 순간들의 절정은 오직 짧은 비명만 토해내게 한다.
짧은 비명은 한 번도 완벽하지 않아, 다시 오면 또 토해낸다.
바닷가는 정말, 끝이 보이지 않지만, 모레 길은 달빛과 건물 사이사이 빚어 나오는 불빛만으로 충분히 넓은 세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배낭은 어느덧 쪽방 구석에 웅크린 채, 주인을 잃을까 봐, 아니 자신의 모든 역할을 잃을까 봐 조바심치며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권의 책이 얌전히 방바닥에 눕혀있다.
청사포는 매일 조용히 있지 않았다. 창문을 살짝 열면 바로 골목길이고,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지나가는 낚시꾼들의 발 잰 소리와 동네 할머니들의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들어왔다. 방안은 매일 시끌시끌하고, 그곳에 얌전히 있던 내면만이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휘청거리는 알루미늄 양은 밥상의 밥조차도 창고 옆방 한 칸은 외로움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 외로움도 곁에 누군가가 있을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