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모든 자연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중에서 우리는 산이라는 자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왔다. 산은 삶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공하였고, 항상 대면해야 하는 존재였으며, 이들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는 언제나 주요한 문제였다. 작은 땅이지만 산의 형태와 자연이 주는 느낌은 지역마다 달랐다. 작지만 분명한 차이는 지역의 특색을 낳았고, 대표적인 예가 전라도의 정원문화와 경상도의 서원문화이다.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정원을 공부하며 전라도를 처음 방문하였다. 충청도를 지나 본격적인 전라도로 진입하였을 때, 익숙하지 않은 부드러운 산세를 보며 다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특히 담양으로 가던 길에 지난 화순의 시골길은 소설에서 읽은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전라도 산세는 웅장하지만 도드라지지 않는다. 웅장한 여러 겹의 산세가 이어지면서 땅에 스며들듯이 흘러드는 형상은 분명 이 지역 사람들의 성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부드러운 자연을 평생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찬양하는 시를 짓는 것은 당연한 욕구지 않을까? 이러한 감탄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역시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가사문학은 발전하였고, 자미탄이라고 하는 배롱나무가 즐비했던 여울가에 정원을 만들고 함께 시를 읊었다.
반면 경상도의 자연 산세는 듬직하다. 묵묵히 생각을 하는 듯한 산이다. 전라도의 다정하며 말을 걸어오는 듯한 산과 다른 분위기다. 전라도의 산들은 함께 어울리고 싶은 산이라면 경상도는 믿고 조용히 생각하고 싶은 산이다. 그 안에서 사색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경상도에는 서원문화가 발달했다. 훌륭한 서원은 인재를 낳았고, 그들은 정치의 중심에 섰다. 시간이 흘러 중심에 서는 것이 익숙해진 이들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이들과 권력을 나누었고, 어떤 서원 출신인지에 따라 당파를 갈랐다. 이후 붕당정치의 근원이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된 서원들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훌륭한 스승을 본받아 성리학 연구를 이어온 서원 27곳은 살아남았다. 남아있는 유서 깊은 서원 가운데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특별하다. 유교 단체의 공간이다 보니 좀처럼 개인의 취향을 느낄 수 없는 일반적인 서원과 달리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라는 개인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서원이다. 원래 서원이라는 것이 스승의 연고지나,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을 기리며 근처에 서원을 만들긴 하지만 서당을 그대로 살리고 뒤를 증축해 서원을 만든 예는 도산서원이 유일하다. 서당에서는 그가 추구했던 삶을, 서원에서는 세상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세 칸의 간결한 집은 퇴계 이황을 담고 있다. 작고 견고한 집이지만 그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이 있다. 혹은 반대로 자신의 삶을 간결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집에 담긴 대학자를 상상하건, 대학자가 담아내고자 한 간결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건, 도산서당은 뜯어볼수록 마음속에 조용한 울림을 만든다. 조정의 숱한 부름에도 잠시 응했다가 관두기를 반복하고 드디어 그토록 바랬던 고요함을 세 칸의 작은 집에서 얻게 된다. 그토록 고요함을 바랐던 이유는 원하는 만큼 충분히 책을 읽으며 살기 위해서였다. 다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고요히 책을 읽고, 제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그가 원하는 삶이었다. 이런 바람을 철저하게 구현해 놓은 것이 바로 도산서당이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3이라는 숫자를 철저히 구현하려고 노력한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음과 양이 만나 태극이 됨을 의미하는 숫자 3은 유학에 있어 완전한 수를 의미한다. 3칸의 집과 3개의 입구, 그리고 3개의 기능을 가진 도산서당은 작은 만큼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도 허투루 결정한 것이 없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방인 완락재玩樂齋의 문이다. 완상 하며 즐긴다는 뜻의 완락재 중앙에는 크기가 작은 문이 달려있다. 도산서당의 남쪽 출입문을 열면 시선의 중앙에 완락재 문이 걸린다. 문의 크기로 봤을 때 출입 시 사용하는 문은 아니고, 창문이라기에는 높이가 낮다. 그러고 보니 툇마루가 없다. 내가 상상하는 작은 문의 의미는 3가지이다. 첫째는 프레임이다. 도산서당 남쪽 출입문을 이용하는 이는 바로 옆 농운정사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이다. 남쪽 출입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프레임 속의 스승이다. 만약 일반적인 문으로 만들었다면 위로 길쭉하거나 큰 프레임 안에 들어와 위엄이 떨어졌을 것이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크기에 많은 여백 없이 채워진 스승의 존재감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두 번째, 드라이브 스루이다. 작은 문 앞에 허리를 숙이고 서서 말하는 이들의 마음은 마치 드라이브 스루로 주문하는 모습, 혹은 고급 외제차 안에서 창문을 살짝 열고 부하의 말을 전해 듣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해야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차례가 왔을 때 실수 없이 간결하게 말해야 하는 분위기는 툇마루 없는 작은 문이 만들어준다. 이런 연출은 방해받지 않고 마음 편히 책에 집중할 시간을 갖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람의 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세 번째는 효율이다. 도산서당의 왼쪽 출입문은 하인들이 이용했다. 식사시간이 되면 밥상을 들고 오는 하인이 신을 벗고 오르락내리락할 필요 없이, 작은 문을 통해 밥상을 전달할 수 있어 효율적이다. 그가 추구하는 간결함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행동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면서도 철저히 스스로 세상과 단절한 듯 학문의 세계에 정진하려는 강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완락재의 문뿐 아니라 방 안쪽도 인상적이다. 책에 진심이면 한옥도 이런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거실 베란다를 확장하듯 방을 확장했다. 책에 진심인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책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 읽는 환경을 쾌적하게 하면서 많은 책을 보관할 수 있도록 부엌으로 반칸을 들여 책장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도산서당 부엌의 기능은 온돌을 데우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에 공간을 양보했다. 하지만 부엌 역시 반칸을 확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을 땔 때마다 매번 하인이 장작을 가지고 와야 한다. 하인이 고생하지 않도록 혹은 일의 효율을 위하여 장작을 보관하는 용도로 반칸을 늘린 것이다.
대청마루인 암서헌 역시 반칸을 늘렸다. 반칸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한 칸 수준이다. 하지만 완전수 3에서 벗어나면 안 되기에 간이건축임을 티 내려고 노력했다. 건축을 전공한 이가 해준 얘기로는 원래는 확장되지 않은 채로 운영되다가 제자가 늘어나서 기존의 대청 규모로는 수용이 불가능해져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청을 확장하면 4칸의 집처럼 보일까 봐 특별한 아이디어를 낸 것 같다. 간이건축이라는 티를 내기 위해 마루를 간살로 만들었다. 중간중간이 비어 있는 간살 마루에 앉는 것은 참 불편했을 것 같다. 방석을 대고 앉아서 괜찮았을 수도 있겠다. 건축을 전공한 이에 따르면 제대로 마루를 만드는 것보다 간살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만들기 어렵고 이용할 때 불편하지만 온전한 한 칸으로 보이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했기에 한 선택 같다.
암서헌巖棲軒은 제자를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제자들 없이 퇴계 이황 혼자 있을 때면 휴식의 공간이 되었다. 아무리 공부해도 부족하기에 바위의 기운이라도 얻어 실력이 나아지길 바란다는 뜻의 암서헌 바로 앞에는 정우당이라는 정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정우당 뒤로는 담장이 없다. 담장이 없는 이유는 도랑 건너 정우당 뒤편의 정원 절우사를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서 감상하기 위해서다. 정우淨友는 깨끗한 친구로 연꽃을 의미하고, 절우節友은 절개를 지키는 친구들로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뜻한다. 암서헌에 앉아 정우당에 자신을 비춰보는 퇴계 이황을 상상해 본다. 퇴계가 남긴 많은 시에는 거울에 고여 있는 물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거울은 자아의 투영이다. 퇴계는 암서헌에 앉아 정우당에 자신을 비춰보았을 것이다.
담장 없이 뻥 뚫린 암서헌의 시선에는 저 멀리 낙동강 일대도 들어왔었다. 낙동강변에는 그가 이름 붙여 놓은 좋은 경치들이 있었다. 그중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는 하늘과 빛, 그리고 구름의 그림자를 담은 물이라는 뜻이다. 저 멀리 하늘을 비추는 강물과 바로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연못을 보면서 부끄럽지 않게 항상 마음을 곧게 하려 애썼을 그를 떠올리게 된다.
퇴계는 다른 이들이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포부를 표명할 때,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본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지, 을사사화로 형의 죽음을 겪으며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두 가지 모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는 외직을 자처하여 단양으로 발령받았다. 그 유명한 '단양팔경丹陽八景'이 바로 퇴계가 지은 것이다. 그는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퇴계의 삶에서 경관이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삶을 채우는 존재였다.
그가 조용히 수양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며 자연에 기거하는 말년을 꿈꾸었다. 그러던 그가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 서원을 알게 되었을 때, 꿈이 실현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백운동 서원은 고려시대에 한반도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에게 제사 지내고, 사당 옆으로는 강당과 기숙사를 지어 그의 학문을 이어가는 곳이었다. 평소에 묵묵하던 그가 왕에게 이곳을 알리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액 서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백운동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을 왕에게 하사 받고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퇴계 이황이 죽은 뒤, 제자들은 그를 모실 서원 자리를 물색했다. 여러 가지 선택지들 가운데 결국은 도산서당 뒤편의 경사지를 다듬어 부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간소했던 그의 서당은 대규모 캠퍼스로 성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간결한 집이자 학교였던 도산서당은 조선 최대 규모의 서원이 되었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그를 추앙했다. 그의 성정은 묵묵한 산의 모습과 닮았다. 산을 믿고 조용히 사색하다 얻은 깨달음이 이곳에 있다. 3칸의 작지만 간결한 건축물 뒤로 듬직하게 이어지는 서원의 건물들이 그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 같다. 경건함 속에 거하며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끝없이 매진했던 퇴계 이황의 삶을 도산서원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