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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Jun 21. 2024

Intro가 좋은 정원

봉화 청암정, 예천 초간정, 영양 서석지

봉화 청암정青巖亭과 예천 초간정草澗亭


마을 어귀를 흐르는 실개천은 저무는 햇빛을 받아 빛이 난다. 주변은 벌써 어두침침해져서 색을 잃어가는데, 윤기가 흐르는 듯한 물줄기를 다리 위에서 보고 있으니 이 물로 키운 곡식들은 유독 풍성하고, 실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풍수지리는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국에 있는 정원유산들을 직접 보러 다니며 느껴지는 땅의 기운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봉화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닭실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주변의 산과 물들이 이곳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닭이 알을 품은 형태의 땅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웃기게 들리지 않았다. 유곡교에서 청암정까지는 500m가 안된다. 느린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언젠가 한국 정원이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기를 바라면서 꼭 지켜졌으면 하는 한 가지가 있다. 정원 바로 옆에 주차장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정원은 점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자연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주변 마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 정원을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위치라고 말한다. 정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정원 감상을 시작해야 한다. 위치를 느끼기 위해서 정원 바로 옆에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입구에, 혹은 10분 정도는 떨어진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야 한다. 



청암정은 집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거대한 암석을 이용해 조성한 정원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충재 권벌의 집 옆에는 거북이를 닮은 거석이 있었다. 이를 물 없는 곳에서 말라가는 거북이로 보고, 집 옆에 흐르는 개천의 물길을 끌어들여 정원을 만들었다. 비로소 아늑한 집을 갖게 된 거북 위에는 등껍질처럼 청암정이 있다. 이 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가에서 암석으로 건너가는 간결한 형태의 돌다리다. 정원에서 종종 다리를 볼 수 있는데, 담양 소쇄원, 구례 운조루와 강릉 선교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원래 있던 다리는 아니고, 새롭게 만들었거나 복원한 듯하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정원, 석파정에 다리가 있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왕가의 공간이니 별개로 친다면 궁이 아닌 개인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다리이다. 단순한 형태의 다리 같지만 분청사기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다리 주 돌의 가로와 세로 비율이 좋다. 너무 가늘어서 불안해 보이지 않으면서 10센티만 더 두꺼웠어도 둔해 보였을 것이다. 가운데 기둥 역할을 하는 돌 역시 자세히 보면 단순한 사각형이 아니다. 먼저 받치고 있는 가로형의 돌 옆 면이 밑으로 갈수록 살짝 깎인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그 아래 기둥 역할을 하는 세로형의 돌은 밑으로 갈수록 다시 넓어진다. 또 다른 기둥인 지안 쪽의 4개의 돌들에서 리듬감이 느껴진다. 가장 아래의 돌은 넓적하고 그 위의 돌은 절반 크기다. 그 위로는 세로 방향의 돌이 지안에 걸쳐져 계단의 첫 단이되었다. 마지막으로 다리의 주 돌의 시작지점을 아래의 돌과 라인을 맞추어 리듬감을 주었다. 또한, 긴 돌의 1/10 정도만 걸쳐져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위해 기둥 하나를 더 두었다. 이 기둥 역시 중간의 두 기둥처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진다. 이뿐 아니라 중간에 있는 기둥 사이의 빈 공간과 크기를 맞춘 듯하다. 만약 지안 쪽 기둥과 중간의 기둥을 같은 형태로 했다면 전체적으로 비율이 한쪽으로 치우쳐졌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간결하면서도 투박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세밀한 선과 균형이 느껴지는 다리이다. 


예천의 초간정은 정원과 주차장이 떨어져 있어서 짧은 산책을 하면서 주변 경관과 정자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례이다. ‘한 폭의 산수화'라고 하는 별명이 있는 초간정은 계류가의 거석들을 건물 기초로 삼아 조성하였다. 전체 공간의 담장 모서리 한 귀퉁이를 날려버리고 정자 건물로 대신한 초간정은 절벽에 세워져 있지만 아찔하기보다는 본래 거석들과 한 몸인 것처럼 보인다. 담장 없이 시원하게 내밀어진 정자는 거친 암석들로 떠받들 여진 건축물 같다. 청암정과 초간정은 모두 거석을 기초 삼아 지어진 정자이다. 한국의 정원에는 유독 거대한 암석이 등장하는 예가 많다. 청암정과 초간정과는 다르게 거석을 경관의 중심으로 삼은 예가 있으니 바로 영양의 서석지이다.




영양 서석지瑞石池


영양 서석지는 규모는 작지만 소쇄원, 보길도와 함께 국내 3대 정원으로 꼽힌다. 가운데 연못을 두고 위쪽과 오른쪽에 각각 건물을 놓은 단순한 형태의 정원이 어떻게 3대 정원에 이름을 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3대 정원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소쇄원과 보길도라는 부동의 두 정원과 함께 이름 올려질 하나의 자리를 서석지가 메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기대 없이 운전하던 길에 별안간 나타난 거대한 절벽에 놀랐다. 충청도, 전라도를 거쳐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올라오던 여정 중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깔과 질감의 암석이었다. 두 개의 천이 만나는 모서리의 절벽은 입체감을 대단했다. 넋을 잃고 운전을 하다 차를 다시 돌렸다. 석문石門 임천林泉 정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정말로 돌로 만든 문이 있었다. 절벽 자금병과 맞은편의 선바위가 문의 기둥의 역할을 해서 이 사이를 지나는 것이 돌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뜻했다. 3대 정원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정원의 규모를 45만여 평이라고 하는 것이 심한 과장이라고 생각했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내원과 가시권의 외원, 그리고 주변 자연환경의 영향권원을 모두 합해 45만여 평이라 말하는 것이 규모가 작은 정원을 치켜세우기 위한 방법이라고 추측했었다.



45만여 평의 정원이라는 표현은 사실이었다. 서석지는 석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석문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영양 암석의 빛깔과 질감을 체험하게 했고, 거대한 암벽의 형상은 서석지 정원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서석지의 돌들은 빛을 머금은 하얀 돌이었다. 여러 개의 돌들을 배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암석이었다. 계곡 주변의 돌 군락을 발견한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은 이를 바닥에 두고 주위에 호안을 쌓았다. 보통은 연못을 만들어 물을 감상하지만, 서석지는 돌을 감상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돌 사이의 주름들은 꾸밈없이 거칠었다. 자연적스럽게 거친 돌들의 표면은 특별한 뜻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석지의 주인 정영방은 영양 사람이 아니다. 영양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다 간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함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임진왜란은 십 대 시절 그에게 큰 사건이었고, 병자호란은 60대의 그가 세상에 미련을 버리고 서석지로 들어가게 만든 계기였다. 정영방은 서석의 형상을 보고 각각 이름을 지었다.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어 ‘물고기 집'이라는 이름의 어상석漁牀石, 넓적한 정사각형의 돌이 꼭 바둑판 같이 생겨 지은 기평석棊枰石처럼 단순한 이름도 있지만 보다 깊은 뜻을 지닌 돌도 있다. 


서석지의 두 건축물인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 사이에는 물이 많이 차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물이 살짝 빠지면 보이는 돌이 있다. 상경尙絅石이라는 이름의 돌은 그대로 해석하면 ‘오히려 홑 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홑 옷’은 한 겹으로 된 옷으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지만 오히려 겉에 홑 옷을 입는다.’는 시경詩經의 의금상경衣錦尙絅에 가져온 말이다. 후에 정영방은 이 돌의 이름을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돌도 아름다운 광채를 머금고도 나타내기 꺼리는데, 어찌 사람이 실상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고 급급하는가?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 정영방

서석지원의 조영배경과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 / 2003(21권 4호) / 김동훈, 김용기, 김두규 / 일부 변형



정영방은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대를 잇기 위해 큰댁에 양자로 들어갔다.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이 아물기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을 피하던 누나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의 스승인 정경세가 인조반정 이후 인재를 천거할 때 사양했다고 한다. 마치 광채를 머금고도 나타내기를 꺼리는 상경석처럼 이곳에서 군자의 도를 깨우치고자 했던 정영방의 삶은 정원과 닮았다. 평생을 살았던 예천에서 연고도 없는 영양으로 와 정원을 만든 이유는 알 수 없다. 언젠가 잠시 여행 왔다가 마음에 품었던 꿈을 실현한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아마도 내가 자금병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 정영방 역시 영양의 기세 좋은 자연 풍광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싶다. 19개의 서석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그의 정원은 담장 안에 갇혀 있지 않다. 경정에 앉으면 아래에는 서석이 담장 밖으로는 석문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영양의 자연을 마음에 품고 그의 말년은 이곳에서 흡족했길 바라 본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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