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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Jun 28. 2024

경복궁 정문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

한국 정원을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원의 ‘위치'이다. 수도 없이 반복하는 이 말을 가장 체험하기 좋은 곳이 서울이다. 한양도성 안에 배치된 궁의 위치와 배치구성은 국가가 추구하는 바를 말해준다. 한양을 수도로 결정한 이유는 산과 물 때문이었다. 북악산, 인왕산, 낙산, 그리고 목멱산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남산까지, 4개의 산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도시 아래로는 한강이라는 좋은 교통수단도 마련되어 있었다. 도성의 윤곽을 갖춘 후 이제 법궁과 종묘의 위치를 정해야 했다. 이때 조선은 북악산이 땅과 만나는 두 개의 흐름에 주목했다. 두 줄기 중 도심 중앙으로 흘러가는 곳에는 종묘를, 왼쪽으로 치우쳤지만 북악산의 정기가 남쪽으로 강하게 흘러 내려가는 곳에는 법궁을 만들었다.


수선전도의 북악산과 왼쪽의 경복궁 오른쪽의 창덕궁 그리고 종묘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배경이 되는 북악산을 함께 볼 수 있다. 북악산의 기운을 받아 만들어진 경복궁은 법궁답게 강한 남북중심축으로 구성되었다. 권력을 드높이는 세상의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경복궁 역시 강력한 축으로 공간을 조성하였지만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이 있다. 북악산과 관악산을 잇는 선을 먼저 측량한 후 남서쪽으로 미세하게 틀어진 축 위에 중심건축물군을 배치한 것이다.


중심건축물군은 3가지로 분류된다. 아래쪽은 광화문과 흥례문을 중심으로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근무지가 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의 민정수석실이다. 궁의 위쪽은 왕의 침실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고 궁에서 유일하게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며, 대부분의 정원은 이곳에 만들어졌다. 중간영역은 왕과 신하가 만나 정치를 한다. 여기에는 조선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인 근정전이 있다. 근정전의 공간 구성은 경복궁의 중심축만큼이나 주변의 산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근정문의 처마가 끝나는 곳에 인왕산의 산세가 시작된다. 인왕산의 산세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곳에서 근정전의 처마가 시작되고 근정전의 처마선이 끝나는 곳에 북악산이 웅장하게 올라간다.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의 처마선은 일부러 맞춘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이다. 멀리 있는 자연과 가까이 있는 인공물이 서로 하나가 되어 공간을 완성한다. 근정전이 이보다 더 높았다면 주변의 산을 앞도 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반대로 근정전이 더 작았다면 초라했을 것이다. 근정전의 크기는 주변 산과 회랑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서 적절하게 결정되었다.


광화문으로 들어온 순간 흥례문의 처마에 맞아떨어지는 북악산의 산세는 자연스러우면서 익살스럽고 개성 있다



왕과 왕비의 정원


궁 안이라도 정원의 언어는 어디든 같다. 규모나 화려함의 수준이 다를 뿐이다. 궁의 안쪽은 왕의 생활공간이다. 왕의 생활공간 구성은 사대부의 집과 같은 언어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민가는 가장 안쪽에 안채를 둔다. 안채는 산자락을 뒤에 두고 배치되는 첫 번째 건물이다. 안채 뒤 언덕은 계단처럼 다듬어진 뒤, 장독대를 두거나 과실수로 꾸며졌다. 같은 방식으로 교태전 뒤에 왕비의 정원, 아미산 화계가 만들어졌다. 다만 일반적인 민가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신중하게 결정한 자리가 바로 교태전이다.


경복궁전도


경복궁전도를 보면 파란색의 물줄기 같은 것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북악산의 산줄기들이다. 축은 결정했지만, 정확히 어디에 중심 건축물군을 위치시킬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가장 힘이 좋게 내려오는 산줄기 바로 앞에 첫 번째로 교태전을 배치하고 이를 시작으로 중심 건축물들이 이어진다. 이러한 축선의 시작이 바로 교태전 아미산 화계이다. 바로 화계가 품고 있는 땅의 기운이 조선의 시작인 것이다.


아미산 화계가 안채와 같은 언어로 만들어졌듯이, 왕의 정원 경회루 역시 사랑채의 언어와 같다. 손님을 맞이하고 학문을 논하던 사랑채 누마루처럼 왕과 학자들이 경연을 펼치던 곳이 경회루다. 경회루는 침전인 강녕전과 신하들의 근무공간이 직교하는 곳에 위치한다. 왕과 신하의 중간지대라고 볼 수 있다. 사랑채 누마루가 주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듯 경회루 역시 마찬가지다. 세종 때, 집현전 학자들을 독려하며 뜨거운 경연이 펼쳐졌던 경회루가 연산군 때는 천 개의 초로 주변을 밝히고, 두 섬은 스테이지로 만들었으며, 하얀 꽃을 물에 띄워 조선에서 제일가는 클럽으로 변했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생활공간보다 뒤에 있는 후원에는 마치 사대부들의 별서와 같은 왕의 개인 정원이 있었다. 창덕궁 후원만큼 자연에 흠뻑 빠진 정원은 아니지만 경복궁 후원에 조성된 건청궁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만든 공간이다. 궁 가장 깊숙한 곳에 생활공간과 집무실을 함께 겸할 목적으로 만든 건청궁 바로 앞에는 향원지가 있다.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이자,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한국의 면면들이 서린 이곳에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이 있다. 향원지의 물은 샘물로 채워졌는데, 물이 흘러드는 방식이 독특하다. 샘에서 나온 물이 동그란 석구를 휘돌아 감는다. 이 물은 다시 오른쪽 구멍을 통해 암거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 과정을 거친 후 한 단계 더 낮아져서 아래쪽으로 흐른다. 이렇게 여러 단계에 거쳐서 물을 흘려보내는 이유가 있다. 아름답게 지어진 향원정을 거울 같은 물에 비춰보기 위해서이다. 만약 샘물이 바로 지당으로 흘러들었다면 파장이 만들어져서 향원정이 흔들려 보였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만든 독특한 입수로는 왕의 정원 다운 화려함을 잠잠히 보여준다.



도심 한복판에 폐허로 남은 궁


겸재 정선,〈경복궁〉, 고려대학교박물관


이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복궁이지만 1592년 임진왜란 이후 270년 동안이나 도심 한복판에서 폐허인 채로 남아 있었다. 도심에서 폐허로 남겨진 채 있었을 경복궁의 모습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경복궁 근처에 살았던 겸재 정선은 폐허로 남아 있던 궁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한쪽 구석에는 경회루로 보이는 방지와 기둥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역시 기둥만 남고 문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흥선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은 50년 후에 또 한 번 난도질당한다. 일제는 광화문을 포함한 근정전 앞의 모든 공간을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복궁 바로 앞으로 대로를 내어서 지금까지도 경복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정문 앞에서 입장권을 사지 못한다. 뭔지 뭐를 웅장한 문을 들어선 다음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후, 이름 모를 문 앞에서 티켓팅을 한다. 혹은 경복궁 오른쪽에 주차를 한 후 입장을 하거나, 지하철을 타는 사람은 경복궁 왼쪽 고궁박물관 앞을 지나 입장한다.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광화문을 지나며 이 문이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월대 복원 후 광화문의 위상은 높아졌다. 언젠가는 광화문 앞에서 입장권을 산 후, 웅장한 광화문을 통과하며 경복궁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안중식의 '백악춘효도'처럼 큰 나무가 있는 경복궁도 보고 싶다. 지금은 풀 한 포기 없는 채로 덩그러니 남아, 때로 모래바람이 일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창덕궁 돈화문 뒤로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남아 있듯이, 경복궁 광화문 뒤로 분명 오래된 노거수들이 남아 있었을 텐데 그 모습을 잃어 아쉽다.


안중식의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부지 평면도

일제강점기 때 근정전 앞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교태전 바로 뒷부분도 모두 밀려버렸다. 경복궁에 흐르는 북악산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흥선대원군이 미래를 예측하고 교태전 뒤에 왕비의 정원인 아미산 화계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왕비의 정원인 아미산 화계는 제외하고 그 뒷부분을 모두 밀어낸 후 일본식 정원을 만들었다. 산의 기운을 막는 데는 연못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훗날 일본식 정원은 없어졌지만 궁에 덩그러니 남은 둔덕과 같은 아미산 화계가 북악산의 정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둔덕이라고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공간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에서 법궁의 중심건축군을 분명한 이유 없이 자리하게 할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복궁전도에 표시된 북악산의 산자락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미산 화계는 보물로 지정된 굴뚝부터, 괴석, 연꽃 모양의 수조, 해시계를 놓던 앙부일구대까지 여러 가지 점경물들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이 화려함 속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두 석조에는 화계의 정서를 알려주는 단어가 적혀 있다. 함월지涵月池와 낙하담落霞潭, 달을 품은 못과 노을이 물든 못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왕비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연못에 담긴 달의 모습이 이곳에 갇혀 지내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생각되지는 않았을지 궁금하다. 매일매일 담아내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아름다운 노을을 한 번이라도 가져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낙하담이 달래준다. 두 석조의 이름이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경복궁의 고된 여정을 달래주는 것 같다. 언젠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경복궁이 기다려진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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