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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Jul 12. 2024

몽심재에서의 하룻밤

남원 몽심재夢心齋

어떻게 된 일인지, 몽심재 사랑채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고택에서 뵙게 된 주인께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았는데, 질문이 마음에 드셨는지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감사하지만 아직 숙소를 정하지 못해서 어두워지기 전에 그만 가봐야 한다고 했더니, 불쑥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하셨다. 쌀쌀한 가을이라 난방은 되는지, 화장실은 있는지 궁금했지만, 유서 깊은 고택에서 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여자 혼자 다니는 여행이기도 하고, 시골집이 낯선 도시 사람이기에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고택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이곳을 일구고 지켜 나가시는 주인 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고, 원불교 교당의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이런저런 과일을 챙겨주시고, 추울까 봐 이불도 계속 가져다주셨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이라, 단 잠을 자고 일어나서 어제 주신 과일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원불교 소유 건물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집의 구조 자체가 그런 분들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집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정체 모를 바위 뒤로 집의 마당치고는 경사진 곳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주변 경치를 보니 집 앞의 안산이 너무나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산을 두고 있는 고택은 처음 보았다. 바로 앞의 안산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채를 이렇게 높이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산에서 시선을 내려 집을 둘러보았다. 사랑채 누마루에서는 주인이 보고자 했던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의 방식을 역으로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사랑채 누마루에서 바라보이는 것은 행랑채에 붙어 지어진 정자였다. 정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있었던 커다란 바위에 가려진 채 일부만 보였다. 행랑채에 붙어 있는 정자는 주인을 위한 공간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하인을 위해 만든 정자라는 뜻이었다.



전국 어디에도 하인을 위한 정원은 없다. 믿기 힘들었지만 사랑채에서 정자 사이에 놓인 거석의 존재 이유도 분명했다.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하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낙낙정樂樂亭이지만 읽을 때는 요요정으로 읽는다는 정자는 이름에서도 하인들을 위한 정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생각 말고 그저 즐겁기만 하라는 뜻의 정자에는 정원까지 딸려있다.


사랑마당의 단 아래와 담장 사이에 그 정도의 공간이 있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아늑하고 세심한 구성의 연못에는 높이가 다른 징검다리와 계단이 있었다. 정자가 있는 것도 놀라운데 정원까지 있다니, 위치는 애매하지만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행랑채의 방과 연결된 정자의 문을 보고 확실해졌다. 정말 하인을 위한 정자와 정원이었다. 몽심재를 지은 박동식의 손자인 박해창 대에 이르러 재산이 만석이 되었다고 한다. 남원의 3대 만석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몽심재는 손님 대접을 후하게 하기로 소문이 난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에게도 후해서 그가 죽자 생전에 신세를 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혜비를 세워 영호남 지역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박해창의 아들 박장식은 서울법대의 전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와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을 만난다. 이후 출가하여 원불교의 헌법인 ‘교헌'을 제정하고 몽심재의 옆 건물을 원불교 교단으로 개조한다. 이후 몽심재 역시 원불교에 기증했다. 그래서 지금의 원불교 장덕원 교무님께서 몽심재를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장덕원 교무님께서는 원불교 교무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조경 자격증도 취득하시고 여러 가지 일을 겸하고 계셨다. 이곳으로 발령받기 전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을 털어 정원에 초화류를 심고 열심히 가꾸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기업에서 문화재활용사업으로 몽심재에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아 어렵게 가꾼 정원을 모두 망쳐버렸다고 하셨다. 이렇게 공간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듬뿍 담긴 곳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속상했다. 당장이라도 뭔가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남원까지 오가며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3년의 시간이 지났고, 오늘 이렇게 그날의 일을 글로 남기게 되었다. 문화재청에서 이름도 바뀌며 조직도 새롭게 개편한 국가유산청은 한국의 정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킬 목표를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한국 정원을 활용한 국가유산 활용사업도 계획 중이다. 올해 산림청 산하 한국수목정원관리원도 출범하여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한국정원사업을 계획 중이다. 국가의 기관들이 한국 정원이라는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10년 전 한국 정원 이야기를 하면 "일본이랑 영국에는 있던데 한국에도 정원이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었다. 한국의 정원 문화를 알리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한국 정원을 알리려고 한다. 반가우면서도 두렵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을 방문하기 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장덕원 선생님께서 사비를 털어 열심히 가꾼 정원이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과 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첫째, 공간의 규모에 따라 한 번에 방문할 수 있는 인원수를 제한해야 한다. 한국 정원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인원수를 제한하지 않으면 공간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고 훼손되기 쉽다. 일본의 서방사처럼 미리 예약을 받고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방사는 정원에 입장하기 전, 붓으로 글을 쓰게 한다. 알 수 없는 한자와 일본어였지만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간단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정원에 입장하기 전 마음을 차분히 하여 정원을 다니는 발걸음을 신경 쓰게 하였다.


둘째로는 초화류와 같이 상시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정원의 식물들을 전담으로 관리하는 직원이나 업체가 있어야 한다. 초화류 뿐만 아니라 많아진 방문객으로 인해 바닥 포장과 그 밖의 건조물들에 손상이 생길 경우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유산수리업체도 필요하다. 또한, 연못을 뒤덮고 있는 수생식물을 제거하거나 반대로 물이 말라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정원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방법을 일본의 무린안에서 보았다. 국가유산수리업체가 국가로부터 정원을 위탁받아 관리하며, 정원 활용 프로그램도 진행하였다. 지금의 우리나라 국가유산수리업체는 복원과 수리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정원문화유산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가 있는 전문가 집단이고 수리에 필요한 발 빠른 대처가 가능하기에 문화유산활용과 수리 및 복원을 접목시킨 정원문화유산 운영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주차장과 관람객 안내소이다. 정원은 단순한 점이 아닌 면 안에서 선으로 연결된 점이다. 정원과 관계 맺는 마을이 있고 마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등장하는 것이 정원이다. 정원 바로 앞에 주차장을 만들면 정원의 경관을 해칠 뿐 아니라, 정원과 관계된 주변 요소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또한 주차장에서 정원으로 가는 길을 걸으면 지역의 상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관람객 안내소 역시 보통 컨테이너 박스의 간이 건물이거나 제대로 된 건물이 있더라도 정원의 맥락과는 아무 관계없는 삭막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내가 갔던 유럽과 일본의 정원은 마치 놀이동산에서 나오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기념품 매장처럼, 정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매력적인 서적과 기념품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정원의 맥락에 저해되지 않는 장소와 디자인으로 되어 있어 전체 공간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었다.


앞으로 알려질 한국 정원이 기대된다. 이벤트성의 일시적 방문이 아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한국 문화를 많은 이들에게 알리며, 누군가의 삶에 영감을 주는 한국 정원이 되길 누구보다 바란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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