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t Oudolf의 자연주의 정원
요즘 정원이 대세다. 정원 디자인 클래스도 많다. 대부분이 식재 디자인에 대한 강의이다. 정원 = 식물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때문이다. 정원을 식물로 꾸며 놓은 공간이라고만 생각하면 정원은 소비 공간이 돼버린다. 물론 단순한 소비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스타에 좋아요를 많이 받을 수 있고, 예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공간 역시 좋은 추억이다. 정원은 의도를 가지고 만드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누구나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시대에 수백, 수억의 좋아요를 받는 쇼츠의 가치와 거장이 만든 영화의 가치를 놓고 다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있다. 좋은 영화는 끝없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고 한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정원이 좋은 정원이다.
우리나라 정원의 뜨거운 열기는 네덜란드 작가이자, 자연주의 식재의 대가, 피트 아우돌프 Piet Oudolf를 내한하게 했다.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의 '후스·아우돌프 울산 가든-자연주의 정원'은 아시아 최초로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으로 많은 이들을 열광하게 했다. 사람들은 자원봉사에 나섰고, 그에 맞춰 다큐멘터리 ‘지구별 정원사'도 제작되었다. 자연주의 정원의 인기는 정원=식물이라고 하는 인식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식물만으로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되었고, 정원의 정수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자연주의 정원에서 식물을 대하는 태도는 정원=식물이라고 하는 단편적인 생각에서부터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피트 아우돌프의 자연주의 식재는 유럽 정원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의 정원은 17세기 정형식 정원에서 18세기 풍경화식 정원, 그리고 19세기 윌리암 로빈슨 William Robinson과 20세기 거트루드 지킬 Gertrude Jekyll을 잇는다. 예전 유럽의 정형식 정원에서 회양목을 인위적인 형태로 깎아 다듬던 것에서 지피 초화류를 활용해 인위적인 자연을 조성하는 정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또한 식물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최고의 지식으로 가장 훌륭한 디자인을 뽑아낸 정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예쁜 식물들을 여기저기에 조화롭게 심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조성하는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의 향연은 인간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 같다. 사계절 동안 식물이 나고 자라서 죽는 일련의 변화를 그는 모두 아름답게 연출한다. 마치 삶의 어떠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에트 아돌프의 정원 구조는 정형식의 변형이다. 네덜란드 휴멜로에 위치한 그의 개인 정원의 구조는 단순하다. 사각형의 부지 양 끝에 큰 두 개의 원과 가운데 작은 원을 그리고 십자 형태로 길을 내었다. 개인 정원의 구조를 이렇게 단순화한 것은 그가 이곳을 하나의 실험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를 단순히 할수록 식물의 변화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구조가 아닌 식물만으로 공간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공원들도 정형성의 변형이다. 17세기 정형식 정원은 전체 부지를 작은 정사각형으로 자른 후, 그 안을 여러 도형으로 채워 넣는다. 삼각자와 캠퍼스로 그린 듯한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인 문양이었던 프랑스 정원의 정형성을 그는 느슨한 형식으로 따른다. 큰 반원에 작은 동그라미의 일부가 들어간 모양을 많이 볼 수 있고, 정사각형보다는 직사각형을 사용한다. 혹은 굵은 호스와 같은 곡선이 일정한 각도로 여러 번 꺾이는 형태로 중심 동선을 잡고 나머지 장소를 식재로 가득 채운다. 그의 도면은 딱딱한 정형성을 띄지는 않지만 기하학적인 형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피에트 아돌프의 정원과 공원들이 이처럼 단순한 동선을 갖는 이유는 식물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동선은 오히려 식물의 조화로운 구성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또한 식물의 레이어를 굉장히 다층적으로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동선이 복잡하면 식물 감상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하나의 흐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가듯 걸으며 식물을 감상하면 된다. 동선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한번 걷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으며 미쳐 놓친 부분을 위해 한번 더 걷고 싶다면 아까 했던 선택과 한 두 번 정도 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단순한 동선이지만 그가 만드는 길의 가장 큰 특징은 계속해서 일정한 각도로 꺾인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시선의 한가운데가 길로 비어버리는 일이 없다. 옆으로 둥근 동선의 위, 아래와 왼쪽, 오른쪽 모두 기획된 식재로 채워진다. 주로 가장자리는 키가 큰 초화류를, 가운데 작은 원과 같은 곳은 잔디를 심는다. 대체적으로 초화류의 구성이 가장자리는 키가 크게 하고 중간으로 올 수록 작은 편이다. 시야가 식재로 너무 꽉 차지 않으면서도 풍부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얇고 촘촘한 잎과 볼륨감 있는 식재, 군데군데 대비되는 색감과 질감을 주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의도 속에 정원의 완성도는 올라간다.
얼마 전 한 박사님께서 한국적인 공간을 구현해야 하는데 전통 식재가 아닌 현대 식재를 사용하는 것이 고민이 된다고 하셨다. 현대에 사용되는, 혹은 구할 수 있는 정원의 식물이 과거와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셨다. 식물은 시대마다 변해왔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많은 수종이 도입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정원에 사용하는 식물이 자생종 보다 외래수종이 더 많을 정도였다. 정원의 스타일은 시대마다 바뀌었고, 지금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식물을 심으면 된다. 울산의 피트 아우돌프의 정원엔 향등골나물, 벌개미취, 돌마타리, 숫잔대 등의 한국 자생 식물이 심겼다. 한국 땅에, 한국의 자생 식물을 심은 네덜란드 작가의 정원은 한국 정원일까? 그러한 불필요한 정의를 하기 이전에 정원에 사용되는 언어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내가 생각하는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작가에게 필요하다.
한국이 추구하는 정원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피트 아우돌프의 자연주의 정원을 사랑하게 했다. 그의 정원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우리가 과학과 인공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이 추구해 온 정원의 자연스러움과 자연주의 정원은 대척점에 있다. 우리는 그의 자연주의 정원을 따라 하고 모방할 수는 있지만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식물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은 좋은 훈련이다. 식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으로 황홀경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경지는 감탄을 자아낸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를 찾아 나서는 서양인들의 여정속에 자리 잡은 정원이 자연주의 정원이다. 정원을 나 자신의 확장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생에서 깨닫고, 성찰한 바를 정원으로 표현하는 동양의 정원은 다른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이 만나고 겹쳐, 서로 영향을 받아 함께 발전할 수 있다. 정원의 재료인 식물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만큼, 또 다른 재료인 돌과 물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더불어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발견해 낸 다양한 재료들도 정원에 새롭게 도입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형과 동선 그리고 시선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의 출발은 정원의 의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것이 끝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정원을 꿈꾸는 작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고민이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