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하랑 Jun 07. 2024

묵묵히 생각하는 산을 닮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모든 자연은 각자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는 산이라고 하는 자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왔다. 산은 삶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공하였고, 항상 대면해야 하는 존재였으며, 이들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는 언제나 주요한 문제였다. 작은 땅이지만 산의 형태와 자연이 주는 느낌은 지역마다 달랐다. 작지만 분명한 차이는 지역의 특색을 낳았고, 대표적인 예가 전라도의 정원문화와 경상도의 서원문화이다.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정원을 공부하며 전라도를 처음 방문하였다. 충청도를 지나 본격적인 전라도로 진입하였을 때, 익숙하지 않은 부드러운 산세를 보며 다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특히 담양으로 가던 길에 지난 화순의 시골길은 문학작품을 읽으며 상상했던 정겨운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전라도 산세는 웅장하지만 도드라지지 않는다. 웅장한 여러 겹의 산세가 이어지면서 땅에 스며들듯이 흘러드는 형상은 분명 이 지역 사람들의 성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부드러운 자연을 평생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찬양하는 시를 짓는 것은 당연한 욕구지 않을까? 이러한 감탄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역시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가사문학은 발전하였고, 자미탄 가에 각자의 정원을 만들며 공유하였다.


반면 경상도의 자연 산세는 듬직하다. 묵묵히 생각을 하는 듯한 산이다. 전라도의 다정하며 말을 걸어오는 듯한 산과 다른 분위기다. 전라도의 산들은 함께 어울리고 싶은 산이라면 경상도의 산은 믿고 조용히 생각하고 싶은 산이다. 그 안에서 조용히 사색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경상도에는 서원문화가 발달하였다. 훌륭한 서원은 인재를 낳았고, 그들은 정치의 중심에 섰다. 중심에 있던 그들 중 몇몇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이들과 권력을 나누었고, 어떤 서원 출신인지에 따라 당파를 갈랐다. 이후 붕당정치의 근원이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된 서원들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고, 훌륭한 스승을 본받아 성리학 연구를 이어온 서원 27곳이 살아남았다. 그렇게 남은 유서 깊은 서원 가운데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원은 유교 단체의 공간이다 보니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진 않는다. 다만, 스승이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것을 바탕으로 건축물의 이름을 지었다. 경주 옥산서원의 ‘구인당求仁堂'과 ‘체인묘體仁廟'는 평소 이언적이 성리학에서 ‘인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에 핵심 건물인 강당과 사당의 이름이 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퇴계 이황이라는 개인을 느낄 수 있다. 본래 스승의 연고지나,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간을 발전시키긴 하지만 서당을 그대로 살리고 뒤를 증축해 서원을 만든 예는 도산서원이 유일하다. 서당에서는 그가 추구했던 삶을, 서원에서는 세상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3칸의 작은 집 


도산서당 평면도


도산서당 정면도 (출처: 영남대도면 / 김봉렬(1997), 김동욱(1996)의 논문 참조)


처음 도산서당을 보면 퇴계 이황이라는 큰 인물이 이토록 작고 간결한 집에 살았다는 것에 감동을 받는다. 집을 계속 보고 있으면 점점 이보다 더 완벽한 공간은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3칸의 작은 집은 르 꼬르뷔지에 Le Corbusier의 오두막이라 불리는 카바농 드 바캉스 Le Cabanon de vacances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동시에 건축가였다. 3칸 집이 흔히 그렇듯 부엌, 방 그리고 마루 구성이다. 집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 칸의 구성은 유지하되 자신의 쓰임에 맞게 과감히 변형하였다. ‘세 칸'이라는 물리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세 개의 기능'에 충실한 변형이었다. 수양修養, 강학講學 그리고 유식遊息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방인 완락재玩樂齋와 마루 암서헌巖棲軒이 담당할 수 있도록 원형에 충실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기법으로 변형했다. 이는 근본을 꿰뚫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먼저 수양의 공간인 완락재에는 많은 책을 보관할 공간이 필요했고, 밤에는 침실이자 낮에는 서재이기에 여유로운 공간도 필요했다. 도산서당 옆에는 제자들이 수학하는 농운정사가 있었고, 도산서당에 기거하는 이들을 보필하는 하인들의 고직사가 있었다. 부엌의 기능은 이곳에서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서당의 부엌은 온돌의 역할만 수행하면 되었다. 하여 부엌 쪽으로 방을 반칸 확장시켜 1,000여 권의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책장을 만들었다.


반칸을 늘려 책장으로 사용한 공간의 모습(왼쪽: 방 안에서 / 오른쪽: 밖에서 본 측면)


완락재에서 수양을 하던 방문이 열리고 암서헌에 앉은 제자들을 마주할 때 도산서당은 강학 공간으로 변모했다.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암서헌 옆으로 간의 마루를 덧대었다. 덧댄 마루의 살이 촘촘하지 않은 것은 3칸의 집이 주는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 그의 의도였다. 남다른 방 문의 형태에서 그의 또 다른 의도가 느껴진다. 완락재 남쪽은 문이 아닌 창문이다. 남쪽으로 문을 만들지 않은 것은 서재에 앉아 수양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며, 가능하면 찾는 이들이 없길 바라는 그의 마음처럼 보인다. 그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수양처에서 끝없이 수양하고자 했다. 창문의 크기가 작아 누군가 밥상을 들이더라도 안으로 들어올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문 밖에서 간단히 이야기할 일이었다. 누구든 이 작은 문을 보면 한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완락재를 3 등분한 크기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피사체는 균형감 있다. 완락재의 간결한 기능은 미적으로도 완성도 있었다.



3칸의 집의 메시지는 담장과 마당으로 확장되었다. 담장의 동남쪽 모서리는 파격적으로 뚫려있다. 이는 도산서당의 마지막 기능, 유식의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 비어 있는 암서헌에 퇴계가 걸터앉아 작은 연못, 정우당淨友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퇴계가 남긴 수많은 시에는 거울에 비유되는, 고여 있는 물이 등장한다. 거울은 자아의 투영이다. 퇴계는 암서헌에 앉아 정우당에 비친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때 뚫린 담장은 그의 시선을 작은 연못 넘어 낙동강까지 이어지게 했다. 도산서당 앞 낙동강변에는 그가 이름 붙여 놓은 좋은 경치들이 있었다. 그중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는 하늘과 빛, 그리고 구름의 그림자를 담은 물을 의미한다. 자신을 비추는 연못과, 하늘을 비추는 강물이 서로 대칭을 이루며, 근경과 원경으로 짜인 구도를 만들었다. 낙동강이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비추듯, 암서헌 앞에는 자신을 비추는 연못을 만들고 자주 들여다보며 마음을 곧게 하려 애썼다. 작고 단순해 보이는 집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니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성리학의 이치를 마치 수식화해 공간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담장이 뚫린 모습 / 향나무를 제거한 정우당 / 낙동강의 시사단



도산서원



퇴계는 다른 이들이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포부를 표명할 때,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본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지, 을사사화로 형의 죽음을 겪으며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가 외직을 자처하여 단양으로 발령을 받은 후 남긴 '단양팔경丹陽八景'을 통해,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찾는 그의 모습이 상상해 본다. 퇴계의 삶에서 경관이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삶을 채우는 존재였다.


그가 꿈꾸는 말년은 조용히 수양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며 자연에 기거하는 삶이었다. 그러던 그가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 서원을 알게 되었을 때, 꿈이 현실화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백운동 서원은 고려시대에 한반도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에게 제사 지내고, 사당 옆으로는 강당과 기숙사를 지어 그의 학문을 이어가는 곳이었다. 평소 묵묵하던 그가 왕에게 이곳을 알리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액 서원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렇게 백운동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을 왕에게 하사 받고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퇴계 이황이 죽은 뒤 제자들은 그를 모실 서원 자리를 물색했다. 여러 가지 선택지들 가운데 결국은 도산서당 뒤편의 경사지를 다듬어 부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간소했던 그의 서당은 대규모 캠퍼스로 성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간결한 집이자 학교였던 도산서당은 조선의 서원 중에 최대 규모로 남게 되었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그를 추앙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는 서원이 되기 전 서당에 기거하는 퇴계 이황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도산서원이 다른 서원과 또 다른 점은 누각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정문 또는 정문 바로 다음 건물로 지어져 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즐기는 누각이 도산서원에만 없다. 계상정거도를 보면 서당에 앉아서도 누각에서 누릴 수 있는 경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담장이 예전보다 높게 복원되어 앉아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지만, 담장을 낮추고 불필요한 노거수들을 제거하면 시원한 낙동강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그의 성정은 묵묵한 산의 모습과 닮았다. 산을 믿고 조용히 사색하다 얻은 깨달음이 이곳에 있다. 3칸의 작지만 간결한 건축물 뒤로 듬직하게 이어지는 서원의 건물들이 그와 그를 이어나가는 제자들 같다. 경건함 속에 거하며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끝없이 매진했던 퇴계 이황의 삶을 도산서원에서 만나보자.


계상정거도 (출처: K옥션)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이전 22화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