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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May 31. 2024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

현대 한국 조경의 거장

수많은 정원박람회가 여러 지자체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느껴지듯 ‘정원'이라는 키워드는 대세다. 특히 조경계는 ‘정영선'이라는 이름으로 뜨거워졌다. 그를 알거나 만나본 조경인은 ‘정영선'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품어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미술관의 전시,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심지어 유퀴즈에까지 출현하며 아는 사람들만 아는 ‘대가'에서 대중에게 인기 있는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나서기 꺼리시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에 바쁘셔서 지금의 유명세를 어떻게 느끼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귀찮으면서도 흐뭇한 마음도 있으실 거라 짐작해 본다.



그가 조성한 수많은 작품들을 열거해 보면 잘 모르는 이도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일 거다. 예술의 전당(1988), 잠실 아시아공원(1986),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1993), 청계광장(2005), 광화문광장(2007), 신라호텔 영빈관(2009), 인천국제공항(2001), 국립중앙박물관(1997), 호암미술관 희원(1998), 선유도공원(2001),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2007), 경춘선 숲길(2016), 아모레퍼시픽 신사옥(2016), 디올 성수(2023)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정원에 조예가 깊은 조경가로서의 그의 작품 8개를 선택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주 작은 정원에서 시민들을 위한 공원, 현대적이면서 전통적인 공간까지 규모와 스타일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발견되는 한국성을 찾고자 한다.



정영선의 공원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는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참 세련된 주거공간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주차장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녹지 공간을 최대로 확보한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의 가장 큰 자랑은 무엇보다 단지 앞에 있는 아시아공원일 것이다. 2호선 잠실운동장역과 아파트 사이에 조성된 7만 제곱미터의 시민공원은 위치로 보나 이름으로 보나 아파트 앞마당처럼 느껴진다. 두 개의 넓은 잔디밭과 그 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를 주축으로 송파문화원과 원형노천극장이 조성된 아시아공원은 일반적인 공원과 다른 정영선 만의 기법이 느껴진다. 조경가 정영선이 공간 조성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디자인 기법은 지형이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지형이라는 것이 짐작되지 않을 만큼 주변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지형의 높낮이 변화의 세련됨은 그가 가진 힘이다. 아시아공원은 그렇게 큰 공원은 아니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이 지형을 통해 적절히 분할 배치되어 있다. 나지막한 언덕이 필요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8차선대로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아시아공원을 지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면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마을처럼 고요하다. 아파트 앞에 있는 도로가 무색하게 공원과 아파트 내 울창한 나무 아래 한가롭게 걸어 다니는 이들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적절한 지형의 변화를 통해 공원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루하지 않은 산책로, 그리고 소음차단이라는 효과와 아늑한 분위기까지 조성하였으니 그를 지형술사라 부르고 싶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를 함께 만든 건축가 조성룡과 합을 맞춘 또 다른 공원은 바로 ‘선유도 공원'이다. 양화대교 중간에 섬의 일부가 걸쳐져 있는 선유도 공원은 본래 정수장 시설로 사용하던 산업화 공간을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도시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으로 회복하고자 한 선유도 공원에서 그의 손길을 특히 느낄 수 있는 곳은 ‘시간의 정원’이다. 공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시간의 정원은 본래 약품침전지였다. 다른 부지보다 낮고, 오픈된 지하공간인 시간의 정원에서 그의 또 다른 특기가 발현된다.


시간의 정원 한편에는 어둠이 드리는 곳이 있다.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나무 숲이 울창한 이곳은 햇빛이 그나마 덜 드는 공간이다. 빛과 어둠, 막힘과 트임이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정원은 부지 자체가 가진 특이성을 그대로 흡수하여 만든 정원이다. 일부러 만든 어둠도, 막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공간에 적절한 식재를 하고 동선을 유도한 것만으로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정영선 조경가는 식재를 사용할 때 과함이 없다. 질감이나 색감을 채우지 않고 힘을 뺀 듯한 식재 조성은 공간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공원을 오픈하고 둘러보던 중 누군가 한구석에서 울고 있어 말을 건네었더니, 죽으려다가 공원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의 위로를 받아 결심을 바꿨다고 한다. 그 말에 함께 울면서 용기 내어 새롭게 살아보자고 했다는 그의 일화는 선유도 공원이 옛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공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정영선과 기업


출처: Youtube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브랜드 무비 1편

용산 아모레 퍼시픽 신사옥의 루프 가든은 단순한 구성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본래 소나무로 계획되었던 공간을 다간형의 단풍나무로 바꾼 것은 그의 아이디어다.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 David Chipperfield가 조성한 이 건물은 가늘고 새하얀 선형의 부드러움이 특징인데 만약 소나무가 그대로 식재되었다면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도드라지고, 전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재배되는 단풍나무는 다간형이 아니다. 수형이 일직선으로 곧아야 조경수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간형의 단풍나무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해안가에 버려진 단풍나무를 찾았다고 한다. 조경수로서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던 나무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올라가는 수간과 건축물의 부드러운 선형이 조화를 이루고, 가을이면 건물의 하얀 외관이 붉은 단풍의 아름다움의 배경이 되어 하나가 된다. 생태적으로도 높은 곳의 강한 바람을 이겨내기에 소나무보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단풍나무가 적절하였고, 오랜 기간 뿌리돌림으로 나무를 준비시켜서 지금의 완성도를 갖추게 됐다.


삼성 아산병원의 공원은 공간의 기능이 정서적으로 반영된 성공적인 사례이다. 병원은 몸이 아픈 환자에게 의술을 제공하는 공간이지만 아픈 사람의 마음까진 돌봐주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의술을 제공하더라도 환자 스스로 나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투병 생활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다. 아픈 환자만큼 힘든 것이 그들을 돌보는 가족이다. 그들에게도 눈물 훔칠 공간이, 또 매일매일 힘든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의료진 역시 마음 둘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삼성 아산병원의 공원은 만들어졌다. 누구든 맘 편히 울다가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울창한 숲으로 그늘을 만들고, 동선과 직각으로 벤치를 두어 다른 이를 의식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게 했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들이 아픈 사람들을 안아주는 듯한 공원은 병실에서 장례식장과 화장터가 마주 보이던 경관을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경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픈 이들에게 죽음의 메시지가 아닌 생명의 에너지를 주어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생기길 바랐다.




정영선의 작은 정원


거대 프로젝트만 담당할 것 같은 거장인 정영선은 대상지 규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저 대상지에 필요한 언어가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핀다. 그가 만든 북촌 설화수의 집, 디올 성수, 피크닉 옥상 정원 등은 작지만 감각적이게 디자인되어 젊은이들 사이의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정원에는 그의 특기인 지형, 시선의 변화 등을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공간뿐 아니라 식재 설계의 대가이다. 미선나무, 물철쭉, 미나리아재비, 할미꽃, 물망초, 병아리 꽃나무 등을 보면 이곳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전통 수종을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조경가인 정영선의 정원에 꼭 등장하는 식재이다. 공원에서 느끼는 시원함과 달리 그가 조성한 작은 정원에서는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빽빽하지 않고 듬성듬성 식재된 식물들은 무엇하나 강한 빛깔을 띄지 않는 편이다. 꽃들은 잔잔하고 잎은 드세지 않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의 색감 역시 조화에 신경 써 배치한다. 디올 성수 정원 공사 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식물 몇 가지를 잔뜩 빼버리고 난 후 ‘이제 좀 숨통이 틔이지 않니?’라고 말하는 그는 인위적이지 않고, 여백이 있는 한국 예술의 감수성을 식물을 통해서도 구현해 낸다.




현대 한국 정원의 정수, 희원


정영선이 많은 이들이 존경하고 세계적인 조경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가진 한국성에 있다. 희원은 한국 정원이 과거의 유산이 아닌 지금의 우리 삶에 살아 숨 쉬는 문화가 되게 해준 작품이다. 호암미술관을 중심으로 맞은편 산을 향해 강한 남북 축선으로 중심 공간을 조성하였다. 전체적인 동선의 흐름은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진입하며 매화나무 숲을 통과한 후 작은 정자가 있는 연못 정원을 지나, 주정인 법연지에 다다르는 구성이다. 전체 콘셉트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와 애련지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세부적인 장식의 배치구성은 전통과 관계없이 파격적으로 응용하였고 감각적으로 사용되었다.



진입공간에서부터 정영선 특유의 방식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특히 진입공간이 전부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한다. 우리나라 전통 공간은 문을 열었을 때 내부 공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차면담으로 가리거나 건물의 일부만 노출시킨다. 또한 문을 통해 보이는 공간의 비례감에도 신경을 쓰는데 대표적인 궁궐의 예가 낙선재의 장락문과 연경당의 수인문 등이다. 이러한 전통의 설계 언어를 현대 공간에 도입하여 매화나무 숲을 조성하면서 진입동선이 곡선으로 꺾여 뒤에 공간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진입공간인 매림梅林은 작은 석상들을 수십 개 배치하여 아기자기하다. 중간중간 보이는 문무인석은 아마도 사대부묘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카페로 가는 길목의 망주석 역시 묘에서 사용되는 장식인데 의미와 상관없이 전체 공간을 흥미롭게 해 주고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적절히 사용되었다고 느껴졌다.



매림과 소정 사이의 단차를 자연스럽게 조정하기 위해 있는 좁고 긴 공간이 있다. 역시나 매림 끝의 문을 통해 바로 보이는 것을 막고 다음 공간 사이에 잠깐의 쉼을 두어 기대감과 휴식을 제공한다. 이렇게 섬세한 동선의 구성이 한국 전통 공간의 맥락이자 그가 자주 구사하는 공간의 흐름 방식이다. 그다음 등장하는 소정은 전형적인 궁궐 정원 양식이다. 작은 정자의 기둥 일부는 물속에 잠겨 있고, 맞은편에는 소나무 심고, 뒤로 흘러내려오는 지형은 화계로 처리하였다. 물이 입수되는 구조물도 애련지와 같은 현폭 기법을 사용하여 후원을 모티브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대로 만들지 않고 약간의 변화를 주어 궁과 달리 방문객에게 친절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소정 다음에 등장하는 주정은 부용지와 마찬가지로 옆 면으로 진입해서 들어간다. 중심 공간의 축과 직교하는 동선의 축은 전체 부지의 형태가 동서로 긴 까닭도 있지만 부용지가 그러했기에 과감히 시도했을 것이다. 부용지와 다른 점은 진입과 함께 관목으로 시야를 막아 카페 혹은 미술관으로 동선을 유도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호암미술관 앞에서 맞은편 산을 향해 뻥 뚫리는 시선의 해방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맞은편 산은 정원의 일부다. 연못 중앙의 소나무는 위로 우뚝 서지 않고 옆으로 누웠다. 이는 맞은편의 산이 옆으로 누워있는 형태의 산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뚝 선 소나무를 두었다면 산이 납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정의 남쪽에는 낮은 단 위에 괴석을 미술 작품처럼 전시해 놓았다. 원래 삼신산을 의미하는 괴석은 보통 정원 뒤편을 장식한다. 괴석을 미술 작품처럼 전면에 배치한 것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호암미술관 관람 후 돌아 나가는 길을 채워주는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느껴진다. 정원 곳곳에 배치된 돌거북, 석양石羊, 물확은 시선의 소소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게 한다. 석양은 원래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이지만 이곳의 양들은 정원을 뛰어노는 것 같이 느껴진다. 배치도 대칭이 아닌 시선의 방향으로 삐딱하게 두었다. 이 밖에도 석축의 형태, 꽃담 배치, 남쪽의 계류 등도 있다.


그가 조성한 공간은 담고자 하는 메시지, 전체 공간의 시퀀스, 재료와 식물의 적절한 사용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더한 곳도 덜한 곳도 없이 담담히 조성된 공간은 때론 강함을 때론 서정성을 때로는 아기자기함을 보여준다. 모든 곳에 그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작가가 흔히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이 공간에 뿜어져 나오기 마련인데, 그의 공간에서는 공통적으로 디자인적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이어나가고 있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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