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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Apr 12. 2024

비 오는 날의 정원 / 조경가 정영선

사계절 따라 떠나는 정원_비 / Intro

비 오는 차 안, 그치기를 기다릴 겸 연속된 답사로 지친 눈을 감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세차지는 빗줄기에 이대로 오늘 답사를 접을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눈앞을 가릴 정도의 비가 아니라면 사진을 찍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에 문제는 없다. 카메라와 얼굴을 감싸고 소쇄원으로 향했다. 대나무 숲 아래 오리들이 놀고 있었다. 함께 비를 맞아주어 고마웠다. 숲을 지나니 물소리 가득한 소쇄원이 있었다.



“비가 와도 투어는 진행되나요?”

경복궁, 창덕궁 정원 투어 때 주로 물어보시는 질문이다.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비가 오면 더 좋습니다.”


그날의 경험으로 비 오는 정원의 매력에 푹 빠졌다. 비가 오는 정원은 살아 움직인다. 시원한 물소리, 역동적인 물의 움직임은 정원의 작동원리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지 않아 고여서 침전물이 쌓여가던 정원을 씻겨주고, 평소에는 졸졸 흐르던 폭포도 콸콸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흐른다. 비 오는 정원의 또 다른 매력은 고요이다. 북적이는 사람들 없이 고요하게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궂은 날씨를 뚫고 정원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정원에서 바뀌는 날씨, 계절, 시간은 정원의 옷장이다. 같은 정원도 어떤 계절과 시간대, 날씨에 가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정원에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의 정원이 가진 매력을 찾아 즐기는 것은 방문자의 몫이다. 그날 이후 박사님과 소장님들을 모시고 또 한 번 소쇄원에 갔었다. 화창한 날씨에 노랗게 핀 창포가 정원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줬다. 비가 오는 날은 혼자라 좋았고, 날씨 화창한 날엔 함께라서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소쇄원의 새벽과 밤을 경험해보고 싶다.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햇빛의 농도에 따라 점차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다. 달빛 아래서 아이유의 밤편지를 틀어놓고 창 밖에 걸려 있는 매화나무 가지 보며 술 한잔 기울이고 싶다.





조경가 정영선


돌이켜보면 행운이었다. 학부 때 특강으로 정영선 소장님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그가 조성한 정원을 직접 방문하며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특별한 정원이었다. 초입에 있는 큰 바위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런 바위를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말씀하시며 좋은 재료를 찾은 것에 대한 자부심과 그런 수고로움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이를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날은 부지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을 조경가의 눈으로 살려내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땅의 일부는 어둡기도 하고, 쓰레기가 몰려오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해결책이 필요했다. 아예 땅을 메꿔서 움푹 들어간 지형을 없애버리는 것이 쉬웠겠지만 필요 없는 나무를 솎아내고 지형에 단차를 만들어 평소에는 타원형 극장처럼 쓸 수 있도록 지형을 다듬었더니 놀랍게도 다른 곳들은 홍수피해를 입을 때 이 공간이 물을 담아주어 그런지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하셨다.

 

또 다른 부지는 가파른 경사가 이어졌다. 대문을 열자마자 집과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새로운 언덕을 추가해야 하는데 원래 있던 지형과 조화를 이뤄서 원래부터 있던 언덕 같았다. 언덕을 지나 마당 안에는 병아리꽃나무를 심었다. 만약 대단한 소나무가 있었다면 과시처럼 느껴져서 수준을 떨어트렸을 것이다. 아이같이 순수한 병아리꽃나무가 마당을 장식하고 있으니 겸손하게 느껴지면서 더 많은 것들이 마당에 담기는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보였는데 정자로 가는 다리를 꺾은 모양으로 한 것이 중국 스러운 분위기를 낸다며 바꾸고 싶어 하셨다. 당시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된다.


그녀가 가진 땅과 경관에 대한 태도는 작업 과정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러한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서 자라며 시인을 꿈꿨던 그녀의 삶에서부터 기인하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주인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먼 경치를 바라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해 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 정자들을 보러 다녔다. 정자에 가면 시문들이 걸려있는데, 시들을 읽으면서 옛 조상들이 경관을 바라보는 눈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많이 가보고 눈에 넣어야 한다. 그렇게 배우는 수밖에 없다."


아주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관에 대한 눈을 기르신 방법을 말씀해 주시며 전국에 있는 한국 정원들을 보며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 내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눈을 가질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날의 기억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숙제처럼 느껴졌다. 훗날 전국에 있는 정원유산을 답사하며 떠돌아다닌 것은 내 방랑벽과 글로만 읽었던 곳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뿐 아니라, 정영선 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경관에 대한 눈을 기르는 법에 대한 가르침의 영향이 크다. 직접 정원들을 눈에 담고 오랫동안 머물렀던 경험은 경관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눈을 기르게 했다.



지금 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정영선 소장님에 대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조경가가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 조경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벅차다. 학부시절, 할머니셨던 소장님께서 혹시라도 편찮아지실까 봐 그녀의 세계관을 담은 작품집을 남겨야 한다고 교수님을 졸랐었는데, 이렇게 전시회가 열리니 너무나 반갑다. 전시회뿐 아니라 ‘땅에 쓰는 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개봉된다. 정원이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된 것은 경제적 성장에 따른 시대적 흐름이지만 그동안 좋은 작품을 전국에 만드시며 많은 조경가들에게 귀감이 되어주신 정영선 소장님이 계시기에, 한국 정원은 그 맥을 이어간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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