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각각의 계절>
각각의 계절 저자 권여선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3.05.07.
오랜만에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첫 번째 작품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고, 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오랜만에 소설 읽는 맛이란 게 이런 거였지… 생각했다.
그리고 뒤이어 실린 작품들도, 다 그랬다.
소설 읽는 맛
책을 읽은 며칠 후,
우연찮게 가수 요조가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사슴벌레 타투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렸다.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고, 이 타투를 했다고.
사슴벌레의 앞에 툭 튀어나온 더듬이 같이 생긴 그것(찾아보니 그게 ‘턱’이라고 한다.)에 Q와 A를 걸고 있는 그 사슴벌레의 모습이 예쁘기 짝이 없었다.
책을 읽고, 그 곤충을 몸에 새기는 아티스트와,
그 그림을 찰떡같이 그려내는 타투이스트.
소설가와 가수 그리고 타투이스트의 삼각 콜라보. 예술적이야.
그나저나 사슴벌레의 그것이 턱이라고 하니
주걱턱도 이런 주걱턱이 없네. 갑자기 못생겨 보인다 사슴벌레.
‘사슴벌레식 문답’은 그 문답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화자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서 하룻밤 묵게 되는데
그 민박집에 방충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사슴벌레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한 친구가 그 사슴벌레를 빗자루로 살살 유인해 밖으로 빼낸 후,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하면서 방충망이 있는데 저런 큰 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건가요?라고 묻자
주인아주머니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 말로부터 사슴벌레식 문답이 시작되는데
이런 식이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사슴벌레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이렇게 처음엔 사슴벌레식 문답이란 의연함을 상징했다.
단호함까지 느껴지는 사슴벌레식 문답.
그러나 화자는 얼마 후 이 말에서 ‘차단’의 뉘앙스를 발견한다.
어쩌면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해 심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경애는 그렇다 치고, 부영이는 왜 내 전화도 받지 않는 거니?
내가 묻는다.
부영이는 왜든 네 전화도 받지 않아.
정원이 답한다.
어떻게 네 추모 모임에도 안 오니?
어떻게든 내 추모 모임에도 안 와.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말의 방식이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너 어떻게 이러냐? 네가 어떻게 이래?
나 어떻게든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 않다는 말은 미안할 방법이 없다는,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 그 뼈아픈 결락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 여행을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채색하려 애써왔다.
그러나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 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한 마디의 말에서
이런 감정도, 저런 감정도 또 다른 감정도 담아낼 수 있음이 놀랍다.
작가의 해석에 따라 달리 읽히는 같은 문장이라니.
이렇게 말이라는 게 미묘하다.
기억하고 싶은 소설.
그림을 몸에 새긴 요조의 마음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