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의 역습
방심(放心)
명사
1. 마음을 다잡지 아니하고 풀어놓아 버림.
2.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짐.
3. 염려하던 마음을 놓음.
나는 내성 발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발톱 관리를 해줘야만 한다. 처음엔 이게 내성 발톱인지 뭔지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엄지발가락에 생긴 통증에 괴로워하던 중에 얼마 안가 나는 내가 내성 발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성 발톱이라는 것에 대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젊었던 나의 엄마는 주기적으로 방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바라보며 끙끙대고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나의 엄마를 괴롭게 한 그 주범이 바로 내성발톱이었다.
그 못된 놈의 이름이 내성 발톱 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어쨌든 주기적으로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지게끔 하는 그 못된 녀석을 난 이미 진즉부터 그렇게 목격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내가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자 거짓말처럼 내게도 그 못된 녀석이 찾아왔다. 처음에 나는 이 녀석의 정체가 그 시절 엄마를 그토록이나 끔찍이 괴롭혔던 녀석일 거라곤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20대까지만 해도 내 발톱에는 녀석이 엄습해 올 것 같다는 전조 증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발톱이 아파 올 땐 그저 오래 걸어서이겠거니, 오래 서 있어서 이겠거니 하면서 조금 쉬어 주면 금방 통증은 가라앉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도 네일이니 페디큐어는 고사하고 손톱도 한참 만에야 한 번씩 깎아주고 했던 나는 그렇게 내 발을 방치 아닌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도 한참 만에야) 발톱을 깎기 위해 오랜만에 내 발가락과 마주한 나는, 내 살 속으로 아주 교묘하고, 알뜰히도 파고들어 가기 위해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는 녀석과 원치 않는 조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닮을걸 닮아야지...’
그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속에서 찐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랬다.
신기하게도 나는 내 엄마로부터 그다지 반갑게 여겨지지 않을 만한 것들의 형질을 그대로 다 물려받고 있었다.
어떻게 수단을 부려도 처치가 곤란한 극강의 반곱슬 머리 (그래서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어린 시절 무렵에는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찾아가 매직 시술을 받는 수고로움과 적잖은 비용을 감당해야만 했다.)와
자라다 만 것 같은 작달막한 키, 그리고 좀처럼 둥글 맞지 못한 까다롭고, 예민하기 그지없는 피곤한 성격까지.
반면, 돈 주고는 억지로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을 엄마의 백만 불짜리 진한 쌍꺼풀과 오뚝한 코, 주먹만 한 얼굴은 아쉽게도 내가 물려받은 유전적 요소에서 철저히 제외되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어디 가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기세를 뽐내는 그 괄괄한 성격까지도.
그렇게 나는 정작 엄마에게서 닮고 싶은 것들은 그대로 안드로메다 어디론가 날려버린 채, 내 일상을 불편하고,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들만 고스란히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런데 내성발톱이라니...
엄마를 닮지 않기 위해.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그토록이나 피나게 노력하며 살아왔건만, 갑자기 뜬금없는 불청객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게 된 그 순간.
생뚱맞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딸이었고, 지금도 엄마의 딸이며, 앞으로도 엄마의 딸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그 명징한 진실과 나는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늘 내 곁에 있었지만 가능만 하다면 어떻게든 부인하고 싶었던 그 진실을.
현실 부정도 잠시, 얼마 안 가 나는 내 인생에 녀석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나는 정기적으로 녀석을 관찰, 관리하기 위해 평소엔 무관심하던 내 발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
조금만 방심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다가는 내 살 속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언제든 날 지옥의 세계로 보내버릴지도 모르는 녀석의 존재.
이런 경계와, 근심과, 예민한 감정으로 녀석을 대하기 시작한 지 몇 달째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난 녀석의 존재를 느끼면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각 속에는 내가 누군가의 딸이고 혹은 누군가의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는 연결체일 수도 있다는 지각도 함께한다.
방심하며, 방심한 채 살아가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 방심이 나를 향한 매서운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최대한 방심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