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
소설의 후반부에야 등장하는 이 페이지를 보고 마음이 우뚝 멈췄다. 내가 쓴 건가 싶을 정도로 흥분되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매년 12월 마지막 주가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반성의 시간과 다음 해를 기약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일기장에 기록하곤 하는데 고정으로 등장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무척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균형감각을 잃지 말자.
온화하지만 단단하게,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유연한 자세로.
2019.12.29의 기록
내 생각을 작가가 그대로 읽은 걸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자아상인 걸까.
혼란스러웠지만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더 집중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소설에서 화수라는 인물은 위에서 설명한 그대로의 사람이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을 맞닥뜨리며 급격하게 변해버린 인물로 묘사된다.
생기를 잃은 사람처럼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감을 상실해버린 가여운 여자.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시든 꽃처럼 다신 살아날 수 없는, 텅 빈 동공으로 허공만 응시하는 그런 사람.
그게 화수였다.
끔찍했던 그날의 사건은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버렸다. 무지개 같던 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적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심해로 빠져버린 것.. 그런 그녀를 애달프게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않는 한 남자가 있다.
넘어지지 않을 것 같고, 온화한데 당차며,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 그녀와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 사랑스럽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마지막 심정으로 남자는 사랑을 갈구했다. 이젠 그만 방황하고 돌아와 달라고.
화수는 긴 시간 본인이 아닌 채로 살아갔던 것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여전히 그러고 싶어..?”
이 대목에서 나는 책장을 덮고 깊이 생각한다.
화수 같은 여자가 되고 싶어서, 20대 중반부터 줄곧 마음을 가지런히 갈고닦았는데 그런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근처에라도 간 걸까?
울퉁불퉁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발로 톡톡 치는 방법을 배웠고, 이제는 돌부리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예기치 못한 외부의 요인으로 불행이 덮친다면 화수처럼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이겨낼 것인지 스스로에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원한 건 화수의 긍정적인 모습이었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기심을 나눠 갖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평생을 함께하고자 마음을 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끊임없이 건네고픈 사람이지 절망을 안기고 싶진 않았다.
그러던 중, 크루즈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화수가 남편에게 속삭이듯 말한, 사랑을 빵에 비유한 대사(위의 문장)를 보며 화수라는 사람에 또 한 번 매료되었다.
단전에서부터 찌르르하는 울림이 차올랐다.
그리곤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화수의 내공이 느껴져서, 아니 정확히는 이 인물을 그려낸 작가의 내공에 혀를 내둘렀다.
맞아. 우리가 하는 사랑은 멈춰 있는 게 아니라 매일 새롭게 반죽해서 예쁘게 구워주는거지. 잘 익었나 확인하면서, 부풀지 못하고 주저앉은 부분에는 왜 그런지 세심하게 바라봐주며, 매일이 다른 모양일지라도 바뀐 형태도 받아들이며 노력하는 거였어
비단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돌멩이처럼 멈춰 있는 건 없다는 삶의 지혜를 내가 닮고 싶은 인물에 투영시켜 작가는 전달한 것이다.
그래. 내가 원하는 ‘그런 여자’는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넘어져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딛고 일어나
멈추지 않고 매일을 만들어가는 사람인 게 아닐까.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뭐하나 게을러하지 않고 다양한 모양을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말이다.
본 글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을 읽고 짤막하게 쓴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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