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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Jul 23. 2023

행복한 아빠 불행한 아빠(17)

숫자 놀이에 빠진 세상

사진: UnsplashMick Haupt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 문장으로 쌩텍쥐페리가 얼마나 통찰력 있게 이 세상을 보았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문장으로 쓰였지만 이 문장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딱히 숫자가 아닌 것으로 세상을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숫자의 등장은 경제의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결국은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그것을 보관하고 처리하기 위해 일련의 문자 체계가 필요했고 그것이 곧 숫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숫자는 서구 아라비아 숫자인데 인도에서 발명된 0을 포함하여 9까지 십진법을 이용한다. 숫자 체계가 없던 시절 숫자까지 '발명'해가며 고대인들이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숫자라고 하는 인류 모두에게 공평한 가치 척도로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류의 노력으로 21세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숫자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숫자 없이는 나를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하루를 상상해 보자. 아침에 숫자로 맞춰진 알람소리와 함께 일어난다. 숫자로 정해진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에게 얼마의 숫자만큼 시간이 있는지 계산하고, 휴대폰에 밤새 와있는 메시지 숫자를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 팔로워 숫자를 확인한다. 시계에서 안내해 주는 심박수에 맞춰서 가볍게 아침 운동을 하고 건강 안내 정보지에 따라 적당한 양의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섭취하고, 계량된 비타민제를 삼킨다. 한 알, 두 알 세어가며. 숫자로 이름 지어진 대중교통에 올라타 숫자로 정량화된 금액을 지불한다. 연봉 협상이 있는 날엔 내 1년 치가 숫자로 정해진다. 업무를 위해 자리에 앉자 온갖 엑셀 파일들에 가득 채워진 숫자가 날 기다린다. 고객들의 정보가 수치화되어 나타난다. 아내에게 온 전화 너머로 아이가 수학 점수를 몇 점 맞았는지, 영어 점수가 몇 점인지에 따라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한다. 종일 숫자와 씨름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렘수면 주기 1시간 30분을 4사이클 반복하는 6시간 취침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책을 읽다가 00페이지에 북마크를 하고 잠이 든다. 우리는 숫자 없이 나를 표현하기도 어렵고, 나의 하루를 설명하기도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이 모든 숫자로의 계량화는 너무나도 복잡한 세상을 단순화시켜 준다는데 있어서 그 효과가 엄청나다. 하지만 이 숫자로 인해 우리는 진짜 나의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불합리함 속에 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과 더불어 은행 신용대출을 잔뜩 안고 있는 나지만 단 한 번도 연체 없이 십수 년을 갚았다. 내가 연체 없이 빚을 갚기 위해 해온 보이지 않는 나의 노력보다 DTI, DSR과 더불어 나의 연봉, 나의 신용 점수 등으로 평가된 내 점수 때문에 때로는 이자가 속수무책으로 높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더 이상 대출이 안 되는 좌절을 겪기도 한다.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개개인의 사정을 다 들어주면 도대체 어떤 기준에 맞춰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과 나의 사이가 아닌 나와 나 혹은 나와 내 작은 사회에서 하는 얘기라면? 충분히 우리는 개개인의 삶을 들어줄 수도 있고 돌아봐줄 수도 있다. 나에 대한 평가 역시 나 스스로 숫자로 매기기보다는 조금 더 섬세하게 할 수 있다. 가령 올해 책을 몇 권 읽었는가, 달리기는 몇 초 빨라졌는가 보다는 내가 올해 깨달은 것은 무엇이고 그로 인해 내가 겪은 성장은 무엇인가, 작년에 비해 한강변 달리기를 하면서 얼마나 더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볼 힘이 생겼는가처럼 말이다.


나 스스로도 나를 숫자가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이 세상은 숫자로 평가되는 아빠들 투성이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아빠들 역시 자녀들에게 숫자로 자신을 표현하고 가르친다. 심지어 자녀들에게 자신의 연봉이 얼마며, 상위 몇 분율이고, 지금 살고 있는 집값이 얼마인지 임대주택에 사는 아빠들보다 자신이 얼마나 더 잘났는지 떠들어 댄다. 아이들에게 정해진 시간만큼 놀아준다. 하루에 한 시간은 놀아주는 아빠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빠들에게 배운 자녀들은 세상을 또 숫자로 측정할 뿐이다. 고작 10개의 아라비아 숫자에 갇힌 우리들의 삶은 오묘한 무지갯빛의 색깔 변화를 나타낼 수 없다. 그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의 색깔로 명명될 뿐이다. 16개의 MBTI 중 하나일 뿐이며, 소득 백분위의 상 중 하층 중 어딘가에 놓여있을 뿐이다. 숫자는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다. 그 덕분에 이 복잡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과 내 가족, 공동체에 있어서만큼은 숫자가 아닌 단어로, 문장으로 표현하고 표현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 스스로를 연봉 얼마짜리 아빠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행복지수마저 숫자로 표현되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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