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무의미했던 성장
의미를 만들어줄 마법의 단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이제 약 두 달 뒤면 그리운 가족들을 상봉하게 될 것이다. 6개월 정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물론 두 번째지만) 더욱 예리하고 날카로운 조각칼로 내 생각에 새겨진 것이 있다. 우리 모두는 원석과 같다고 한다. 평생 배움과 경험의 조각칼로 끊임없이 세공되는 과정을 겪는데 그 과정에서 점점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운이 나빠 그렇지 못한 환경에 가능성 풍부한 원석이었음에도 볼품없는 석탄 조각처럼 툭툭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내 삶은 감사함과 행운의 연속이다. 이렇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마저도 나를 세공하는 조각칼은 그저 또 다른 기적을 깨닫게 해 준다. 지난 6개월 간 자기 계발의 늪에 빠져 지내는 한국인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크게 성장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책은 열 권 남짓 읽었고, 매달 평균 100km 정도 뛰었으며, 몸무게가 약 7kg 줄었다. 근육이 조금 더 붙고 날씬해져 배 나온 중년의 몸매는 벗어났다. 여러 편의 글을 썼고 특히 행복한 아빠 불행한 아빠 시리즈를 연재하여 마무리를 지어가고 있다. 웃는 부부 웹툰을 연재하고, 소설 두 편 정도 쓸 아이디어를 갖고 정리하고 있다. 업무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이뤄냈다. 대다수 나의 업무 결과는 평가가 좋았다. 타인을 위한 노력도 아낌없이 하였다. 하지만 이런 성과들은 가시적인 '업적'을 이뤄낸 것이 아니기에 말 그대로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면에 누구에게도 수치로 보여줄 수 없는 성장을 겪었다. 가장 잘 다듬어진 조각칼이 나라는 원석을 조금씩 세공해 나갈 때 어떤 성장은 불필요한 덩어리를 과감하게 쳐내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아름다운 곡선, 빛 반사, 조화를 위한 정밀한 가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지난 6개월은 나에게 후자의 다듬기가 이뤄지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늘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장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만 성장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정의하는 바가 달라서 콕 집어 이런 성장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내 직업적 특성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성장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가 많았고, 그런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말해준 것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목적적인 성장. 오직 한 가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면 절대적인 그 성장이 바로 사랑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에 질량을 부여했다는 힉스 입자가 있다면, 인간의 존재에 모든 의미를 부여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인간이란 원석이 보석으로 세공되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빛에 반응하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사랑은 상실되고 본능이 유린하는 우주 역사 최초로 역행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6개월 간 나의 모든 시간은 개인적인 성장으로는 조그마한 유의미함이 있었을지 몰라도 사랑의 측면에서는 무의미했다. 인간의 깨달음과 성장은 때로는 반대되는 개념을 통해 이뤄진다. 에릭슨의 심리발달 이론에 따르면 가령 신뢰라는 개념을 아이가 익히기 위해서는 불신을 경험해야 한다. 울면 늘 나타나는 부모의 반응에 신뢰라는 개념을 익힐 수 없다. 어느 날 아무리 울어도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보며 불신을 느끼고 비로소 그간 나타나 주었던 것이 신뢰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시간 나에게 주어진 행운들(공짜 비행기표로 내 인생에 절대 내 돈 들여와 볼 것 같지 않은 아랍에미리트에 왔고 두바이, 아부다비 등 세계적인 도시들을 경험했으며,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 등을 경험했다.)을 돌이켜보건대 모든 나의 사진 속에, 기억 속에, 경험 속에 함께한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것은 마치 무미 건조한 흑색의 선들을 그어 데생을 그려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과 같았고, 탄산이 빠져버린 탄산수와 같았다. 세계 최고의 호텔이 앉아 먹은 조식 테이블 앞에 아내가 없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 분명한 쇼핑 타운에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없었다. 사막 위에 기적을 그려놓은 두바이, 아부다비의 신화를 나누며 창조적 인간의 위대한 성과를 함께 누릴 사람이 없었다. 물론 동료들은 늘 내 사진 속에, 공간 속에 함께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바로 내가 말하는 사랑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난 존재들이다. 가장 완전한 사랑의 존재.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나의 힉스 입자. 나를 별의 자녀로 인식하고 우주적 존재로 만들어줄 사람. 빛과 소금. 나의 사랑, 아내가 없었다.
나의 이런 성장에 대해 언급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이렇게 세속적인 성장과 소비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채울 수 없는 공허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지배한 황제이지만 그는 자신이 행복했던 날이 7일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자신이 사랑했지만 사랑해주지 않았던 조세핀을 떠올리며 한 말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역시 알려진 바와 같이 불행하다. 그의 끝없는 정복 야욕도 권력에 취함도 모두 조세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나폴레옹의 그런 모습이 아니었으리라. 안타까운 사랑이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나폴레옹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모두가 물에 담그면 다 사라져 버릴 공허한 솜사탕 같은 성과만 잔뜩 이뤄내려고 한다. 아무리 부풀어 오른 거대한 솜사탕일지라도 물에 담그면 한 순간 사라져 버린다. 모두가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허우적댄 결과다. 지난 6개월 간 나 역시 그런 솜사탕 같은 성과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별 것 아니지만 그나마 이뤄낸 작은 성취들은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거라도 해야지라는 생각에 이뤄낸 것들이 많다. 자기 계발을 신봉하고 노력을 신봉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 계발과 사랑이 무슨 관계인지조차 감이 안 올 것이다. 그러나 진정 사랑을 해보고 깨달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랑을 이룬 순간 모든 성취와 성과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저 먹고사는 수단에 불과하다. 원석이 다듬어져 보석이 되었을 때 그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아름답게 봐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이후 그 보석을 더 다듬을 필요가 없다. 그런 존재가 없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아쉬워 계속해서 다듬어 나갈 뿐이다. 내가 보기에 나의 존재는 늘 아쉽게 마련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날 때까지 깎고 또 깎아나가다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자아가 파괴되는 것이다.
먹고살 걱정은 역시나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나 역시 먹고살 걱정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랑이라고 하는 든든한 후원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는 시간들이 의미가 있다. 만약 그 후원이 없이 그저 먹고살 걱정을 한다면 내가 정글 속의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먹고살 걱정 때문에 때론 우리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성장 없이 직장에서 도태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서가 바뀌었다. 인간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취 뒤에는 늘 사랑이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사랑하는 순간에 상대성 이론을 내놓았으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역시 사랑에 빠진 그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상상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 곤궁함을 이겨내기 위해 행동한 모든 결과는 인간에게 불행을 초래했다. 앞서 말한 나폴레옹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다. 사랑하기에 성장에 이유가 생기는 것이고, 사랑받기에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지난 6개월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 내가 처절하게 그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텨낸 시간이다.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이 시간 끝에 나의 사랑과 재회한다면 나는 다시금 내 삶에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내가 사랑받지 않는 것은 아니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매 순간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유한한 인간의 삶을 떠올리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 잡고 질주하는 죽음으로 향하는 레이스는 찬란하다. 매 순간 의미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레이스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만큼은 죽음을 초월한 그 너머를 향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 채 홀로 다니는 이 레이스는 분명한 죽음이 있다. 그래서일까 함께한 시간들에 상투적인 사랑 고백인 것 같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지금 떨어져 있는 순간엔 '절대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라는 처절한 외침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아내와 또 떨어져 지내야 할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든 외부 환경의 강요이든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죽음을 향한 레이스일지라도 처절하게 버텨내어 희망의 시간으로 포장하고 정신승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라는 보석을 다듬는데 무의미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기보단 이미 다듬어진 그 상태의 서로를 충분히 음미하고, 찬미하고, 어루만지며 삶에 의미가 부여된 이 사랑에 감사함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겠다. 단 한순간도 사랑을 멈추지 말라. 사랑이 없는 순간 우리는 광활한 우주에 먼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자. 나라는 원석을 다듬어 가는 모든 과정은 오직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기에 그 모습이 예술가의 춤사위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