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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Aug 06. 2020

#10 아홉살, 죽음을 배우기엔 아직 너무 이른 나이.

6마리의 병아리들을 보내며 어른은 성장하고, 아이는 아쉬워한다.

 

 어떤 생명체를 키워낸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건, 반려견, 반려묘와 같은 대중적인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건, 병아리 같은 정말 작은 생명체를 먹이는 일이건.


병아리를 키우게 됐다. 이곳에 와서만 6마리째다. 다양한 죽음을 겪었다. 첫 번째 병아리는 추워서 죽었다. 체온이 38~39도 정도인 병아리는 따뜻한 온도를 필요로 했지만 우리 집은 가스를 아낀다는 이유로 늘 서늘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지내기엔 혹독했다. 하물며 우리 아이도 독감을 앓았는데. 병아리 사육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지만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분양을 받았다. 아이들이 너무나 키우고 싶어 해 사장님댁에 가서 덥석 물어온 것이다. 아빠, 엄마가 반대할 줄 알고 미리 일을 꾸며놨다. 올해 환갑을 맞이하는 사장님은 아이들과 죽이 잘 맞았다.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아이들만을 위한 타운으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중이신 사장님과 그의 애계(愛鷄). 우리의 병아리는 그의 후손.


다시 또 2마리가 왔다. 처음부터 한 마리는 골골댔다. 영 상태가 이상했지만 첫째 병아리를 그렇게 떠나보냈기에 이번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표선면에 위치한 작은 가축병원에 죽어가는 병아리를 데리고 갔다. 수의 선생님은 백내장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저 영양제를 줄 테니 물이랑 잘 섞어서 주사기에 넣은 후 입에다 한두 방울 떨어뜨려주라고 한다. 병아리가 혹시나 터질세라 꽉 움켜잡지도 못하고 먹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병아리에게 때에 맞게 영양제를 먹여줬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썼다.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었고 어떠한 죽음도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한 녀석은 혈기왕성했다. 아파서 골골대는 병아리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병아리 집으로 가져온 스티로폼 박스를 뛰어넘는 정도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틀지 않은 보일러를 병아리들을 위해서 틀어가며 집 온도도 맞춰줬기에 이 녀석은 정말 잘 자랐다. 이대로 닭이 될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아파하는 병아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쓰러져 있는 병아리를 위해 부축을 해주고, 계속해서 걸으라고 뒤에서 밀어주며 응원하고, 옆에 딱 붙어서 체온을 유지시켜주었다. 병아리에게 우정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아프던 병아리도 영양제를 먹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녀석이 걷기 시작하고 조금씩 먹이를 쪼기 시작한다. 물도 잘 먹는다. 살려냈다!


모든 생명체는 경이롭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단순한 기계적 생명 유지에 의함은 아닌 게 분명하다. 아이들도 살아있음의 숭고함은 느끼는 듯하다.


아침이 되면 병아리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주요한 과업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병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발견된 것은 이미 차가워진 병아리 사체. 그런데 이상하다. 아파서 골골대던 놈이 아니다. 건강하던 놈이다. 왜? 아니 도대체 왜? 나름대로 이유를 분석해봤다.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사장님께 병아리가 또 죽었노라 말씀드렸다. 그리고 둘이 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너무나 건강한 병아리라 스티로폼 박스를 열심히도 쪼았다. 그렇게 쪼아 먹은 스티로폼 조각에 분명 탈이 난 것이다. 사장님댁에 있던 병아리 한 마리도 그렇게 저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너무나도 몰랐다. 병아리를 스티로폼 박스에 키우면 안 된다는 것을. 골골대던 다른 한 녀석은 친구가 죽자 몇 시간도 안돼서 따라 죽었다. 도저히 의지할 친구가 없이는 그 미약한 생명의 끈마저도 붙잡을 이유가 없어진 듯했다. 눈물겨운 우정일까. 아니 형제애라고 해야 할까.


다시는 병아리를 키우지 않겠다고 아이들에게 다짐을 받아냈다. 아이들 역시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잠깐이고 그저 움직이는 장난감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릴 적 강아지를 키운 적이 몇 번 있었다. 처음 키운 녀석은 다운증후군이었다고 한다. 키울 때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결국 일찍 갔다. 두 번째 녀석은 코카스파니엘이었는데 너무나도 까불고 도저히 훈련을 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학생 때 돈을 아껴 비싸게 산 A8 이어폰을 내가 자는 사이 씹어서 개껌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후 다른 사람에게 분양했다. 햄스터를 키운 적도 있다. 50마리까지 불어났다. 새끼 햄스터들을 어미와 분리시켜 박스에 잘 뒀는데 박스를 뚫고 대탈출을 감행했다. 야생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키운 것은 장수풍뎅이 암수 한쌍이었다. 새끼를 낳지 않고 둘 다 죽어 도대체 이게 뭔가 하고 흙을 버리러 나갔다가 3마리의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애벌레를 발견한다.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 자연에 풀어줬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명백한 '똥 손'임을 인정한다. 우리 애들도 사실 잘 못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미안할 따름이다.


육아 '똥 손'인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일까? 가끔 돌변하는 아이들, 내 생각과 다른 아이들을 보며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알면서도 내심 잘못될까 걱정한다.


하지만 2주 후 사장님이 덜컥 3마리를 그냥 보냈다. 어떻게든 키워보자는 것이었다. 반대했다. 자연에서 키워야 한다고. 게다가 막 태어난 새끼들은 어미닭이 있어야지만 한다고. 하지만 이미 내 손에 박스채 3마리의 병아리가 들려져 있었다. 유튜브를 보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 조명도 켜주고 신문도 깔아준다. 2마리는 건강했으나 한 마리는 비실댄다. 약 먹은 병아리라는 말이 실감 난다. 지난번 영양제가 아직 남아 먹인다. 셋은 똘똘 뭉쳐 생존하려고 노력한다. 눈물겨운 생존기다. 이건 우정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미물들 조차 우정이 있는 거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우정도 그렇다면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까운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고등종의 특성이 갖는 감성이 더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봄이 와 한낮에 따스한 햇빛이 마당을 적시곤 한다. 병아리들을 바깥에 풀어두고 산책도 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이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때 나도 잠시 낮잠에 취해본다. 큰 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깨운다. 잠에서 막 일어난 터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병아리가 죽어간다고? 큰 아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병아리를 밟았더란다. 병아리 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봄의 기운이 완연한 햇살을 받아 빛나는 잔디는 초록의 풀과 아직 겨울잠을 자는 황금색의 풀이 묘한 조화를 이뤄 토종닭 새끼인 갈색 무늬 병아리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잘 살피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렵다. 큰 아이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뒷걸음질 치다 병아리를 밟은 것이다. 마당에선 작은 아이가 무심한 듯 다른 병아리랑 신나게 놀고 있다.


그 어떠한 생명체도 죽음을 그리 쉽게 선택하지 않는다. 바닷가의 돌 틈, 도저히 뿌리내릴 곳이 없어 보이는 곳에도 생명체는 존재한다.


찬란한 오후의 햇살이 비추는 마당에 그 생의 마지막이 될 이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도 부족해 얼마 들어있지도 않은 제 속의 것들까지 바깥에 꺼내 두고 겨우 숨 쉬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작은 아이가 못 본듯한 눈치다. 큰 아이는 충격에 여전히 울먹이지만 더 이상 그 장면을 보게 두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는 이 미물을 바로 땅을 파서 묻는 것이 과연 옳은가. 생이 붙어 있다면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들이 방금까지 너무나도 잔잔하던 내면의 바다에 풍랑을 일으킨다. 어찌해야 하나. 일단 조심스럽게 들어 텃밭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옮겨둔다. 흙으로 덮지는 않고 지켜본다. 도저히 살아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광경이다. 살릴 수 있을까? 두 번째 병아리가 죽어갈 때 심폐소생술을 해본 적 있으나 이것은 그렇게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빠져나온 장기들을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다.


결국 나의 고민이 오래지 않고 병아리는 숨을 거둔다. 조용히 흙을 덮어 묻어준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10억 마리의 닭이 소중한 영양소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그들의 생을 다한다고 한다. 평상시에 치킨이나 닭볶음탕, 닭가슴살 샐러드 등 다양한 요리로 우리의 식탁에 올라와 게걸스럽게 뱃속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들이지만 이 순간 이 죽음이 왜 이렇게도 무겁게 느껴지는지. 역시 자세히 보면, 오래 보면 그 존재 중에 가벼운 것이 없는 것일까. 이 병아리의 죽음 앞에서 신앙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생명체 하나를 방금 내 손으로 묻었다는 것에서 필요 이상의 불편한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죽기 전 그 마지막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고통에 겨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서 분명히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병아리들도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병약했던 녀석은 친구를 잃자 금세 그 명을 다 했고, 다른 한 마리는 햇살 좋은 날 마당에 집을 내놓았는데 고양이가 와서 그 집에서 꺼내갔다.


성읍민속마을. 오래된 마을에 여전히 사람이 거주한다. 그들의 부모, 할머니, 그 윗 세대로부터 이어져온 삶의 터전일 것이다. 죽음은 끝인 온점이 아니라 이어지는 생의 쉼표다.


 어떤 병아리는 인간의 사소한 뒷걸음질에 짧은 생을 하필 찬란하게 빛나던 오후를 다 보내지도 못한 채 마감했다. 수천, 수만 명의 지구인이 코로나 19라는 작은 바이러스에 스러져가는 것도 신의 사소한 뒷걸음질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사소한 것이 병아리에겐 목숨이 달린 일이듯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삶이지만 죽음은 또 어찌 그리 허망하고 쉽게 닥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 아직은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은 그저 눈앞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외증조할머니, 외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그 죽음에 대해서 깨달으려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할까. 아이들은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만 조금은 불안한 느낌을 갖는 것 같다.


제주도에 오고 나서 아무 친족이 없기에 갑자기 나랑 아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항상 죽음은 내 옆에 있기에 그것에 대해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도, 너무 불행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큰 아이가 9살이 되고 그리고 제주에 오고 나서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 가끔 언급한다. 만약 엄마 아빠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숨을 쉬지 않는다면? 제일 먼저 엄마 핸드폰으로 할머니한테 전화하라고 했다. 사장님댁에 가서 엄마 아빠가 일어나질 않는다고 알리라고 했다. 보호 요청을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알아야 할 일이다. 작은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큰 아이 역시 부모가 없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해줄 가장 든든한 존재들이 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인 듯하다. 9년 인생을 항상 함께 했고,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할 것이며, 자신을 낳아준 부모이자, 자신을 진정한 한 명의 인격체로 가장 존중해줄 친구를 잃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감정까지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다.


표선해수욕장의 등대. 부모는 아이들의 삶에서 등대와 같은 존재겠지만 등대 불빛에 의지만 한다면 더 큰 바다로 나가질 못한다. 때로는 그들이 개척해야 할 삶의 바다로 밀어내야 한다.


병아리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다르기 때문에 병아리 죽은 것에 그리 심각해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사실 매일같이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삼킴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고 있으니 그 말도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 가는 동물들이 과연 우리에게 먹잇감이 되려고 태어났을까? 창조주는 동물을 먼저 지으셨고 인간을 마지막에 지으셨다. 아담에게는 동물들에게 이름 짓는 일을 시켰다. 그들을 먹고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 그것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행위다. 감사함. 바로 우리의 식탁에 올려진 어떤 생명체의 죽음들은 바로 그 숭고한 생을 마감함으로 감사함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밤 우리는 치킨을 시켜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그렇다. 병아리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치킨을 시켜먹는 이중성. 아이들에게 그 두 가지의 차이가 무엇인지 나조차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마음만큼은 갖지 않길 바란다.


 이제 제주에 봄이 시작되고 있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모든 것들이 활기차게 그 생의 찬란함을 마음껏 빛내는 시기다. 하지만 봄이 오면서 우리는 죽음을 먼저 겪었다. 사장님도 깨닫고 더 이상 병아리를 부화시켜 어미닭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시지 않았다. 어미닭과 함께 자라고 있는 저 병아리들은 딱 봐도 매우 건강해 보인다. 생명의 고리는 사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그 이후 세대로 줄기차게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역시 부모로부터 그 고리를 이어받아 건강하게 자랐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이어져 지금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건강하게 오래 잘 살아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그래야 지만 우리 아이들도 잘 자라날 것이다. 육아에 미숙한 부모지만 사소한 것 하나에서도 육아의 의미를 배워보려 노력하며 성장한다. 그렇기에 병아리의 죽음은 나에게 아이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가르쳐야 하는지를 또 한 번 되짚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아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치킨이 되어 단순히 영양분을 제공하고 사라진 그 닭보다는 조금 더 숭고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다고 그 무게를 재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억되는 죽음은 있다. 그 병아리의 죽음은 우리에게 기억됐다. 아이가 밟았던 그 상황은 잊길 바라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은 죽음을 이해하고 알기 어려운 나이지만 이 경험을 간직한 채 살면서 또 다른 죽음들을 경험할 때 비로소 그때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아이는 더 큰 성장을 할 것이다. 생명의 시작인 봄의 입구에서 죽음으로 그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배워본다. 아이들은? 아직 죽음을 배우기에 이른 아이들. 삶에 대해서도 이해 못했는데 죽음이라니. 역시 나는 '똥 손' 부모임에 틀림없다.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속속들이 생명력이 넘친다.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풍요롭고 인심이 넘치는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



Tip. 제주살이를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할 것은 '어디에 살 것'인가다. 제주는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로 이분되어 있고 백록담을 중심으로 피자 조각처럼 읍, 면들이 나눠져 있다. 각각의 지역에 따라 조금씩 기후가 다르고, 해안 쪽과 중산간 쪽의 기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특산물도 다르고, 산업의 형태도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거주 형태도 차이가 생긴다. 작은 섬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데서나 산다고 했다가는 자신과 맞지 않는 삶에 불편함을 많이 느낄 수도 있다. 표선면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바람이 많이 불며, 비가 많이 온다. 해안이라 여름철엔 습도도 높다고 한다. 하지만 물 빠짐이 좋아 무 농사가 잘 된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 조용하고 목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면사무소가 위치한 면내보다는 외곽 쪽이 더 살기 좋은 것 같다. 번영로, 일주동로 등 도로가 발달해서 제주시, 서귀포시까지 이르는데 1시간이 안 걸린다. 육지를 완전히 등지면서도 일조량이 풍부한 곳에서 살고 싶었다. 또한 중산간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바다와 거리가 있는 것을 희망했는데 지금의 코지 타운이 나에게는 최적의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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