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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Aug 05. 2020

#9 웃을까 울을까 망설였다네

데카메론 속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닌 주어진 삶을 살아낸 것


* 지오반니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은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10명의 부인들과 청년들이 재앙을 피해 별장에서 지내며 인간사의 희비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코로나 19 사태는 데카메론을 상기시키게 했다. 허무하게 보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미시적인 관점으로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는 않은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의 세상을 보는 관점을 대변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나온 시구절과 일맥상통하다 하겠다.(사진은 위키피디아, 워터하우스의 데카메론)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죽어 없어진 육신은 그저 한 줌 재에 불과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로 넓은 땅이 필요하다. 하지만 꼭 내 것일 필요는 없다.


 코로나 19. 그것은 2019년에 이미 시작됐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아니 아마 대다수 전 세계인이 몰랐을 것이다. 이 작은 바이러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줄은... 요즘엔 이런 말까지 나온다. 세상은 더 이상 BC / AD가 아닌 BC(Before Corona), AC(After Corona)로 나뉘어야 한다고. 인류에게 너무나 큰 대재앙이기에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었다.


독감 투쟁기를 끝난 우리는 더욱더 건강에 신경 쓰며 행복한 제주 생활을 즐겼다. 중국에서 시작된 듯 한 어떤 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스멀스멀 침투해오고 있다는 기사들을 보며 얼마 전까지 독감을 앓았던 터라 당연하게도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이 바이러스의 비밀이 하나씩 풀어지면서 동시에 확진자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는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코로나 19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영화 '컨테이젼'이 생각났다. 그리고 킹덤을 봤다. 인간이 느끼는 '전염병'에 대한 이미지는 가히 좀비를 접하는 수준일 듯. 메시지는 같다. "인간이 더 무섭다."(사진 : 구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조치받아야 하는지도 또 무엇 때문에 감염되는지도 중구난방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를 믿으면서도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가짜 뉴스들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말 그대로 인포데믹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타운하우스에 예약되어 있던 건들이 하나둘씩 취소되기 시작했다. 손님이 뜸해진 타운에는 사장님댁과 우리 집만 남아 썰렁한 경우가 많았다. 이따금씩 오는 손님들도 이상하리만큼 그 전과 다르게 거리가 생겼다.


서로가 모두 예비 바이러스 보균자 취급을 받았다. 교회 예배는 축소되고 이제 막 시작한 찬양팀 활동은 무기한 연기됐다. 다음 주 예배 때 성도들 앞에서 부르기로 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지금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갈음됐다. 신문에서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종교에 대해 철학적인 기사, 사설, 논평이 난무했다. 누구든지 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철학자가 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생존을 위한 명확한 해답은 내놓지 못했다. 철학은 이런 순간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일까. 그 와중에도 정쟁은 끊이질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전히 춥지만 햇빛 좋은 날엔 점심 정도 야외에서 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 오히려 햇빛을 통한 비타민 D 흡수와 적당한 추위의 적응은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세상이 그렇게 고통받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이 우리 타운하우스는 본의 아니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됐다.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주위를 감싸고, 정원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자동 실천 도구가 됐으며, 육아휴직을 한 아빠는 직장에서의 감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아직 개학을 하기 전이니 작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감염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됐다. 손님까지 뜸해 대지 2,000평의 면적에 거주하고 있는 생명체는 6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강아지 그리고 어딘가 숨어있는 곤충을 비롯한 미물들... 우리는 집 안에서 너무나도 안전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에 우릴 태워주셨다." 이러한 사태가 올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저 나는 내가 계획했던 대로 육아휴직을 썼을 뿐이고, 제주도로 내려왔을 뿐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안전망이 될 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삶을 애써 감추며 있을 수만도 없었다. 신문기사는 부고 기사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사회적 아픔을 공감하지만 물리적으로 너무나도 동떨어진 상태라 지하철에서 기침하면 다 쳐다보더라와 같은 변해버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시선까지 느끼긴 어려웠다.


날씨 좋은 날 야외에 빨래를 너는 풍경만큼 한가롭고 여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들 꼭꼭 숨어야 할 때 더욱 밖으로 나오게 되는 삶이 항상 미안하지만 이것이 이곳의 방식이다.


데카메론의 부인들과 청년들의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절대 세상을 냉소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육지에 계신 분들 중에 누구라도 쉼이 필요하다면 안전한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당연히 발열체크, 손 소독 등의 절차도 잊지 않았다. 제주도 내의 확진자 발생에 예의 주시하며 정부차원의 조치들은 모두 따랐다. 그것은 판옵티콘의 사회에서 강제적이고 수동적인 국민으로서 라기보다는 나와 내 이웃을 보호하기 위한 선진 시민의식에 가까웠다.


마당이 듬성듬성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백꽃이 진 자리 옆에는 철쭉과 개나리, 진달래 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목련, 벚꽃, 유채꽃 등은 세상을 온갖 화려한 색깔로 물들일 준비가 완료됐다. 뉴스 기사에서는 사회적 활동이 멈춰진 인간의 빈자리에 지구의 회복과 자연의 재생이 일어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숨만 쉬어도 청량해지는 제주의 공기 아래에서 이곳은 새삼 너무나도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인터넷 댓글에선 제주도민 인듯한 사람들의 육지 여행객들에 대한 비난글이 난무했다. 청정 제주를 지켜야 한다는, 아니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절규였다. 제주는 섬이었고 이곳에서의 코로나 창궐은 자칫 공멸을 일으킬 수 있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당근 수확을 마친 밭에 남은 당근은 우리 몫이다. 육지에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제주에선 나눔이 우선이다. 제주는 청정하고 안전하다는 모종의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육지에서 들리는 지인들의 소식에 의하면 좁은 아파트에 격리된 사람들은 코로나 블루에 힘겨워한다고 한다. 아이들과 24시간 붙어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어땠을까. 우리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행히 제주에서 우리는 각자의 공간으로 피할 수 있었다. 넓은 마당은 우리 가족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만큼의 품이 됐다. 제주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적응해온 24시간 가족과 함께 있기는 코로나가 시작되고는 빛을 발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가족들 모두가 서로 배려하며 함께 지낼지를 연습해온 터였다. 생존을 위한 물리적 조치는 제주에 온 것으로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정신적인 생존과 회복은 우리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가장으로서의 혜안이라기보다는 주신 마음이 그랬기에 노력했고 그것들이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방패가 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코로나는 어떤 존재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 경험이 미천한 이 아이들은 그저 넓은 마당에서 마음껏 뛰놀고 오히려 손님이 없어 한적해진 타운에서 강아지를 독차지하며 엄마 아빠랑 산으로 들로 사람 없는 곳으로만 다니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매일 공포스러운 기사의 홍수 속에서 핸드폰에 요란한 경고음과 진동이라도 오면 행여나 도에서 보낸 재난문자에 확진자 소식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른들과 다르게 아이들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코로나로 인해 고통을 겪었을 또래 아이들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성장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눈이 와도 집 앞마당엔 쌓이지 않는다. 눈이 몹시 그리운 아이들을 위해 눈보라를 뚫고 중산간으로 올라간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눈은 마법의 세계로 통하는 매개체다.


이런 고민을 자주 한다. 순수하고 철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혹독함을 가르쳐줘야 할까 아니면 할 수 있는 한 그들에게 계속 보호막을 덮여줘야 할까. 양극단에 놓이지 않고 적절히 잘 가르쳐주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이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부부 사이일 때, 자녀 사이일 때 더욱 그렇다.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순진해지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 큰 아이는 순수하다. 하지만 작은애는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이렇게 신날 수가 있을까.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지난번 치과치료 때 사용한 웃음 가스의 부작용은 아닐까. 건강해서 고마운데 세상의 아픔을 공감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재난지원금 문제로 떠들썩할 때 주시면 감사, 못주셔도 감사 하지만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곱씹어보고자 다짐한다. 전 국민 지급대상이 되고 이후 여러 지원금들이 더 나왔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우리에게 이 시기 지급된 국가 지원금은 170만 원에 달했다. 웃을까 울을까 망설여졌다. 지금 당장 수중에 돈이 생긴 건 좋지만 결국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고 우리에겐 어려움이 없었기에 괜찮았지만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안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세상은 결코 칼로 두부 베듯 나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것은 차라리 주먹으로 탁 쳐서 으깨진 두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오션 아레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자세는 열정적이다 못해 경건한 수준이다. 엄빠에게 훈계를 들을때도, 가정예배를 드릴때도 이렇게까지 엄숙하진 못하다.


아! 아이들이 피부로 느끼기에 좋지 않은 것이 생기긴 했다. 아쿠아플라넷 연간회원권을 끊고 일주일에 5번을 갈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오션 아레나 공연에 나오는 노래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는데 방문이 어려워졌다. 오션 아레나 공연도 취소가 됐다. 당장 공연에 나오는 눈이 파란 외국인 댄서들은 급여가 나올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연일 오션 아레나를 보고 싶다고 투덜댔다. 친절하게도 아쿠아플라넷 연간회원 기간을 수개월 연장해줬지만 우리가 내년 초에 여길 와서 아쿠아플라넷에 방문할지는 요원한 일이다. 더불어 표선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매주 갔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됐다. 책 반납은 무기한 연기됐고 재개장 여부 역시 기약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아무도 답할 수 없었다.


슬기로운 제주생활은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본의 아니게 더 빛을 발했다. 서울의 3배 면적인 제주도에 인구가 겨우 69만이니 사람 보기가 더 힘들다. 마당이 있어도 때로 그 마당이 좁다 느껴지면 중산간 어딘가의 들판으로 나간다. 그곳은 오직 우리 가족만 있다. 이즈음 넷플릭스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구독 경제는 '슬기로운 00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듯하다. 아이들이 집에 격리되어야 할 상황이라면 최고의 미끼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들을 섭렵한다. 미세먼지를 대비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온 마스크들은 코로나 19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뀐다. 넉넉한 재고에 마스크 공급이 안정될 때까진 문제없겠구나 안심한다. 면역력이 일단 중요할 터이니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목오름이다. 목요일마다 오름을 오르며 심신을 단련한다.


누구든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낸다. 혹독한 바람이 부는 세화오일장도 코로나로 타격이 있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여전히 장이 선다.


 코로나 19는 인류에게 있어 재앙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그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 책임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게도 지금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감사하니 웃어야 할지, 타인의 고통에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해본다. 아이들에게 코로나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친다. 공감 능력을 가지도록 노력해본다. 기도로 세상을 응원해본다. 내가 환자가 되지 않도록 건강에 힘쓰고, 정부 정책을 잘 따른다.


데카메론은 흑사병 때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난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아무리 흑사병이 창궐하여 아침에 봤던 사람이 밤에 죽어 버려진다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 쌓인 시체를 보자면 인간의 존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면 사연 있고, 사랑 있는 아름다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사회의 현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느 한 가지 감정만 가지라고 강제할 수 없다. 책 속에서 얻는 지혜를 통해 용기 내어 본다. 그들의 고통을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면 오늘 난 가족들과 풀밭을 뛰놀며 웃을 수 있고,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눈물짓는 척이 아니라면 오늘 밤 스러져간 한 영혼이 간직한 이야기에 눈물 지을 수 있다고. 그렇게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를 느낀다.


<대한민국이 코로나의 재앙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헌신을 다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독한 추위가 이어진 제주에 이따금 햇살이 미안한 듯 멋쩍게 얼굴을 들이민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망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이 순간 행복을 만끽하는 게 내게 주어진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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