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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Aug 04. 2020

#8 제주야, 우리를 좀 보드마줍서.

제주의 겨울을 만만하게 본 초보 제주 이민자들의 독감 투쟁기


유튜브 시리즈 영상 공개 - 2편 제주에 살멍 https://youtu.be/pOufddeILgk


 제주의 겨울은 혹독하다. 그걸 몰랐다. 남쪽이니까 더 따뜻하겠지. 사실 온도로 치면 영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으니 홍천에서도 지내봤는데 영상 온도면 뭐 이까짓 것 하며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은주가 영하로 안 내려갔지 체감온도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70kg이 훨씬 넘는 나조차 날아갈 것 같은 제주 바람은 참으로 우리를 곤란케 했다. 제주에 온 지 벌써 2달이 지났고 이제는 여행 분위기도 가라앉은 채 우리의 삶이 이어지려는 듯했으나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전원주택의 로망은 역시 바비큐다. 독자적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원주택을 꿈꾼다. 하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감내해야 할 것들이 배 이상이다.


바쁘게 지낸 두 달이었다. 이사 한 이후엔 계속되는 손님맞이가 주요 일상이었다. 전원주택에서의 삶을 적응하는 것도 필요했다. 생각보다 이 삶이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생활권에 익숙해지기 위해 많은 곳을 다녔다. 어느 것이 가장 효율적인 동선인지 차로 직접 가봐야 했다. 서귀포는 얼마마다 한 번이 적당할지 제주시는, 표선면이 나은지 성산읍이 나은지 등등.


서귀포 이마트까지는 차로 50분 거리지만 근처의 김만복 김밥에서의 점심이 오랜 운전의 피로를 달래줬고, 근처에 병원, 스타벅스, 맥도날드가 있어 동선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해를 넘기고 나서는 하나뿐인 동생의 결혼식이 있었기에 1년 동안 절대 안 올 거라고 생각했던 육지에도 다녀왔다. 제주도민으로 육지에 방문하는 기분이 어떤지 맛볼 수도 있어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만난 일가친척, 지인분들 등으로부터 용돈을 잔뜩 받아와 아주 신나는 일들을 경험했다. 아쿠아플라넷 연간회원권 구매와 더불어 육지에서도 못 가본 키자니아를 방학 특집으로 제주에서 열어 다녀온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환자 발생! 환자 발생!" 육지에서도 안 가본 키자니아를 제주에서 방문한 데다가 하루 만에 모든 직업체험을 다 해볼 정도로 열심히 놀았다.


 너무 바쁘게 지낸 탓일까? 나름대로 겨우내 황금향이며 감귤 등 천연 비타민제에 온갖 영양제도 챙겨먹었으나 제주의 혹독하고 변화무쌍한 겨울철 기후에 적응 못한 우리 가족들은 차츰차츰 면역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당이 있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마당에서 뛰어노느라 (그것도 잠옷 입고...) 정신이 없었다. 나름대로 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대청소도 하며 쾌적하게 유지했지만 집에서 따뜻하게 입고 보일러는 비싼 가스비 아낄 겸 적당한 온도로만 맞췄다. 서늘한 집과 매서운 날씨의 바깥을 오갔다. 2층은 정남향이라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25도까지 올라갔으나 너무 건조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밤 잠을 자는데 작은 아이가 끙끙댄다. 열이 39.2도. 해열제를 먹여도 미온수 마사지를 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열은 40도까지 치솟는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부모로서는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 때론 공포다. 자극적인 블로그의 후기들은 아이가 지금 당장 어떻게 될 것 같고 119라도 불러야 할 것 같다고 느끼게 한다. 당장 이 밤에 어디로 가는가. 제주대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하나. 서귀포로 가야 하나. 일단은 호흡도 고르고 잠도 잘 자니 내일 가보자고 한다. 밤새 아내와 불침번을 서며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다.


추워도 신난 아이들. 건강관리는 부모가 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이렇게 웃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건 확실히 부모에겐 공포스러운 일이다.


아침 일찍 준비해서 병원으로 향한다. 제주에서의 삶은 현재까지 대만족이었지만 병원이 먼 것은 확실하다. 가까운 표선에 있는 의원은 소아과 전문의는 아닌 데다 아이에게도 조제되는 약이 한 움큼씩이다. 먹고 잘 낫지 않는 경우도 있어 사소한 감기, 편도염의 경우 병원을 가야 하나 고민스럽다. 게다가 큰 병인 것 같으니 더욱 걱정이다. 결국 서귀포 시가지에 있는 유명한 이비인후과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연휴 시작이라 그마저 어려워 연휴 때 여는 병원을 찾는다. 열려있는 소아과 병원 하나를 발견한다. 안심하고 찾아갔다. 하지만 연휴 시작이라 그런 걸까 제주도 꼬마애들은 여기 다 모인 것 같다. 북적북적. 육지에서 건강검진과 무려 4가 독감주사까지 다 맞고 왔지만 혹시나 몰라 마스크를 챙긴다. 독감이면 모두에게 곤란하니까.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이곳에서 30년 넘게 진료를 보신 분이다. 아이의 상태를 꼼꼼하게 물어보신다. 독감일 수도 있는데 검사를 하겠냐고 물으신다. 당연히 검사를 하겠다고 한다. 기다린 꼬챙이가 어린아이의 콧구멍을 통과해 뇌 앞의 공간 어딘가까지 들어간다. 아이는 그새 못 참고 울음을 터뜨린다. 보고 있는 것으로도 내 비강에 찡함이 느껴지는데 오죽하랴. 잠시 후 A형 독감 판정을 받는다. 그 사이 아이는 살아나서 재밌게 놀고 있지만 이를 어쩐다. 빠르게 머리가 회전한다. 전염력이 강하고 격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최근 접촉한 사람들을 기억에서 꺼내어 연락을 취한다. "우리 작은 아이가 A형 독감이에요."


이날 타격이 컸다. 추운 날임에도 사려니숲길을 방문했다. 피톤치드향을 듬뿍 맞으며 고대부터 있던 아름다운 숲의 광풍에 흠뻑 취해있었다. 제주 찬 바람을 온몸으로 잔뜩 맞으며...


당장 집에서도 격리를 해야 하는데 다행히 2층이 있다. 집에서 쓸 손소독제며, 마스크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약국도 여의치 않다. 보건소에도 연락해본다. 보건소는 A형 독감이 유행 중인 사실도, A형 독감에 대한 대비도 전혀 안되어 있다. 게다가 마침 그 시기 즈음해서 중국발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했다며 전 세계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보건소는 그런 사실조차 모른다. 이런저런 사정을 물으니 마스크 재고도, 손소독제 재고도 없으며, 약국에 없으면 육지에서 들여올 때까지 공급이 제한된다는 답변만 듣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의 상태를 계속 확인한다. 개와 고양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쉴 새 없이 물어보는 아빠가 귀찮았으리라. 이 아이는 정말이지 여름철 매미 울어대듯 멈추질 않고 까불지만 아빠랑 둘이 차를 타고 어딜 갈 때면 이상하리만큼 얌전하게 있는다. 그게 더 걱정스럽다. 다행히 작은 아이는 처방받은 독감약을 집에 와서 한 번 먹고 낫는다. 어젯밤에 열이 40도까지 끓어 우리를 걱정시킨 아이가 맞는가? 4가 주사의 힘이 이런 걸까? 온갖 생각을 해본다. 여하튼 다 나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살아나니 격리는 불가능하다. 2층에 잡아두려 했으나 큰 아이도 동생이 없어서 심심하니 기웃. 결국 1층은 그들의 차지다. 아무렴 살아났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 집의 독감 투쟁기는 이제 시작이다.


그다음 순서는 엄마. 엄마도 몸이 이상하다. 이런 상황은 참 곤란하다. 아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이 없다. 운전에 익숙지 않은 아내에게 표선에서 서귀포는 꽤나 먼 거리고 쉽지 않은 운전길이다. 그래서 아빠 어깨가 무겁다. 엄마가 아프면? 아이들을 두고 엄마랑만 병원에 다녀오기에 왕복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주변에는 아이를 대신 봐줄 양가 부모님도, 친구 가족도 없다. 결국 온 가족이 출동한다. 나름대로 시간을 때울 어떤 것을 생각해서 가본다. 밖은 너무 춥고, 최근 독감을 앓았던 터라 키즈카페 이런 곳은 꺼려지고 결국 생각해낸 게 이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노는 거다.


서귀포 병원은 문전성시다.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아픈 걸까 아니면 여기로만 몰리는 걸까. 아니면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오는 걸까. 2시간이 넘는 대기 후 겨우 진료를 받고 또 A형 독감 판정을 받는다. 엄마는 오래 아플 수 없다. 링거 주사를 놓으면 반나절만에 나을 수 있다고 한다. 보험처리로 되니까 비용 부담도 덜 수 있다. 영양제 주사까지 맞고 4시간 만에 회복한다. 엄마의 힘도 대단하다. 그 사이 우리들은? 김만복 김밥에서 식사 후 이마트에서 어슬렁거리며 잘도 버텨줬다.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다. 돌아오는 길에 아직 깍두기인 아빠와 딸을 위해 테라플루를 산다. 증상이 보이면 바로 마시는 거다.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 장난감 코너에서 그의 눈빛은 번뜩인다. 하나라도 놓질 새라 꼼꼼히 먹잇감이 될 표적을 스캔한다. 희망고문을 주지 않으려 시간을 버는 대신 지갑은 가벼워진다.


"여보 근데 나 몸이 안 좋아. 나도 독감 같아." 다음은 내 차례였다. 아들내미 완치 판정을 위해 병원을 갔다 오는 길에 몸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럼에도 맥도날드 햄버거가 몹시도 먹고 싶어 건강해진 아들과 하나씩 들고 바닷가에서 풍경을 소스 삼아 맛있게 해치운다. 차에 탔는데 완치 판정 소견서를 쥐고 있는 내 손이 떨린다. 춥고 으슬으슬하고 근육통까지. 영락없는 독감 같다. 이번엔 2층이 내 차지가 된다. 환자 호송 갔던 아빠가 격리 대상이 돼버렸다. 테라플루의 힘을 발휘할 때가 됐다. 복용법에 따라 4시간마다 마신다. 2층 보일러를 잔뜩 올린 채 이불을 뒤집어쓴다. 내 몸의 T 세포가 이기나 독감 바이러스가 이기나 한 번 붙어보자고 도발한다. 오후 6시에 시작된 나의 독감 투쟁기는 싱겁게도 다음날 아침 나의 완승으로 끝난다.


4가 독감 주사의 힘일까 3명이 모두 하루를 넘기지 않고 나았다. 스쳐 지나가는 독감이었을지도, 제주도가 우리를 품으려 주는 마지막 시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진 선방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딸아이의 건강이 모두의 관심사다. 걱정은 기우였다. 딸아이는 독감 투쟁기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딸아이에겐 훈장이고 부심이다. 우리 역시 생존자 한 명이 남아서 감사하다. 4가 주사의 힘이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겨우내 잔병치레는 계속되었다. 편도염, 콧물감기, 기침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표선 의원의 의사 선생님 실력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 작은 마을이 갖고 있는 인프라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이 작은 병에도 서귀포의 먼 병원으로 나가야 할지 아니면 한 움큼 가득한 약을 들이켜야 할지, 면역력에 기대 봐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불평, 불만하며 이 좋은 곳에서의 삶을 망칠지. 그때마다 선택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도시와는 다른 삶에 불평하진 말자고 다짐했다. 우리는 사실 알고도 이곳에 왔다.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다른 삶을 사는 것이지 이곳의 삶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잠시 아파서 힘들었을 뿐.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성장한다.


성장통 제대로 겪고 성장한 생존자들. 딸아이는 자신의 건강에 감사, 나를 비롯한 셋은 이만큼만 아프고 나았음에 감사,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다시 언제나 볼 수 있음에 감사.


* 표선면은 작은 마을 치고는 꽤나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의원도 몇 개 있고 치과도 잘 되어 있고 약국도 여러 개여서 주말에도 여는 약국이 항상 있다. 면사무소도 새로 지어져 깨끗하고 도서관도 좋다. 학교도 고등학교까지 있다. 리사무소에 소정의 금액만 지불하면 복지회관에 있는 헬스장을 쓸 수도 있다. 오일장 국밥도 맛있고 두부, 도토리묵은 표선오일장 최고 인기 품목이다. 크게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갖출 건 다 갖춰졌지만 도시에서 이주해 아이를 키우는 터라 의료 인프라만큼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정된 예산으로 돈을 아껴 써야 하다 보니 표선에 있는 여러 마트도 좋지만 포인트도 잘 모여지고 아무래도 가격이 더 싼 이마트를 애용하게 된다. 자주 가면 기름값이 아까우니 3주 ~ 4주에 한 번 방문해서 왕창 사 온다. 냉장고가 가벼워질 때쯤 이마트 갈 때가 됐구나라고 생각한다. 벌크로 사야 하는 것들은 제스코 마트가 싸다. 제주도 코스트코일까. 특히 단백질이 필요하다면 제스코에서 고기를 산다. 그래도 여전히 다이소도 있고 쿠팡 배달도 웬만하면 다 돼서 지금과 같은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평상시 불편함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직업군인이 맨날 전방에 살아서 익숙하다고? 2년 전 내 근무지는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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