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니던 농구클럽에서는 매년 2회 자체 대회를 개최했다. 2~4학년으로 구성된 저학년부와 5~6학년으로 구성된 고학년부로 운영된 덕분에 2학년 때부터 카레는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 2학년 하계대회에서 리바운드상을, 추계대회에서 M.V.P.를 수상하고 '괴물 막내'라는 별명을 얻으며 발병한 '(동네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 증후군'은 전학 후 싹 고쳐졌다. 1학년 선수와 더불어 벤치 V.I.P.로 등극한 것이다.
5~6학년 주전이 활약하는 경기를 직관하며 카레의 자신감은 짜게 식었다. 선배들이 보여주는 기세와 위용은 이 벤치선수로 하여금 코트를 두렵게 하는 역설을 낳아버렸다. 경기 흐름에 따라 코치님은 3학년, 1학년 막내 라인 2명을 호출하여 종료 직전 2~3분가량 뛰게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냉동상태의 카레를 조우했다. 우리 팀은 교체되었어도 상대팀 주전은 그대로이니, 3학년인 카레가 5~6학년 선수들과 겨루는 셈이다.
'퉁!'
카레가 볼을 잡고 치는 첫 드리블은 곧장 최후의 순간을 맞았고, 운이 좋게 드리블 몇 번 치며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저 혼자 스텝이 꼬여 스스로 태클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혼이 날아간 채 주춤대는('달린다'라고 볼 수 없는 다리 놀림이었다) 카레는 좀비팀이 있다면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괴물 막내'는 그렇게 갓 태어난 아기 괴물로 재탄생했다.
"니 이런 데서 농구해 본 적 없제?"
"니는 있나?"
"몇 달 전에 한 번."
"미쳤나!? 이런 데서 놀다 걸리면 준수형이랑 코치님한테 개털린다 아이가!?"
고등학교 농구선수 두 명이 공원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런 데서'란 바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외 농구코트이다. 아니, 실내에서 빵빵하게 에어컨 틀고 운동하는 선수들이라고 이런 '노지' 무시하는 거야? 대화가 이어진다.
"아니, 여기 조명은 어두침침하제, 골대 기둥엔 매트도 안 감겨있어가 부딪히면 오만데 다 부러지겠고, 바닥은 군데군데 미끄러워가 사람들 계속 자빠지는데 백퍼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다치면 어쩔거냐믄서..."
"짜피 안 걸리면 장땡이다이가?"
몇 달 전 한 번 '이런 데서' 농구를 해봤다는 선수는 "재밌드나?"라는 친구 질문에, 못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지만 재밌게 하면 그만이니까 완전 재밌더라는 평을 남긴다. 거기서 곱게 자리 털고 일어나면 재미없지. "혹시 15점 내기 한 게임 안 할래요?" 아마추어 농구인이 내기 게임을 제안하고, 고등학교 1학년 '기상호'는 운명처럼 걸려든다. 7대 1로 전반전을 마무리한 기상호를 무심하게 저기서 바라보던 웬 파란 추리닝이 묻는다.
"니, 엘리트가?"
엘리트가 이런 델 왜 오냐는 관중의 수군거림이 무색하게 '엘리트 함 발라보'고 싶은 파란 추리닝과의 경기에서 기상호는 쩔쩔매고, 급기야 "엘리트, X나 구린데?" 한 방 얻어맞는다. 농구만화 네이버 웹툰 <가비지 타임> 한 장면이다.
첨언하자면 나는 <가비지 타임>으로 농구를 배운다.
아이 전학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클럽'과 '엘리트 체육'의 개념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아이가 1년 간 다녔던 농구교실이 농구교실인 줄 알았지, '클럽'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떻게, 애 농구 시키면서 그것도 몰랐냐고? 나처럼 무지한 국민이 최소 18,361명이나 존재한다! <가비지 타임> 해당 화 베스트 댓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단 말이다.
자기 맘대로 엘리트라고 해놓고. 주인공은 엘리트라고 한 적도 없구만.
왜 제멋대로 '엘리트'라 불러놓고, 엘리트 구리다고 욕하느냐는 항변이다. 이 댓글에 '좋아요' 누른 사람이 18,361명이다. 체육인을 가족이나 친구로 두지 않은 나도 하마터면 눌렀을지 모른다. '학교에서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애들'이라는 웹툰 중 대사처럼, 재능 있는 소수를 선발하여 초중고대 과정에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여 전문 선수로 육성하는 한국 시스템을 엘리트 체육이라고 한다. 프로를 목표로 전문 육성 국가 시스템에 진입한 청소년이라고 할까?
<가비지 타임>으로 배우는 농구 초보 클래스를 이어가자면, 새로 부임한 코치에게 선수들이 자기소개할 때 출신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엘리트 농구의 특징이다. 선수반 코스를 운영하는 클럽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루트이고, 농구선수가 꿈이라면 카레처럼 엘리트 농구부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첫 시작이다.
클럽에서 에이스라 불렸던 카레의 경우, 슛폼을 보자마자 코치, 선수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슛폼 고쳐야겠네."였다. 카레가 다닌 클럽은 알고 보니 대표가 프로 출신이 아닌 아마추어 농구인이었다. 더군다나 게임만 하고 기본기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기본기가 중요한 농구는 초등학교 5학년에는 늦어도 엘리트로 진입해야 한다고들 한다. 실제 중학교 진학을 준비 중인 우리 학교 6학년 선수들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엘리트 농구를 시작했고, 4학년 때 농구하고 싶다는 아들을 반대하다가 올해 초 입단시킨 6학년 한 선수 부모는 농구를 그때 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 중이다. 우리 역시 이 세계는 전혀 몰랐던 부모였기에, 농구교실 선생님만 믿고 쭉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중학교 테스트조차 보지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때서야 "카레야, 엄마, 아빠가 잘 몰랐어, 미안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체력에서도 차이가 컸다. 카레가 다닌 클럽 대회는 총 3 쿼터를 뛰었는데, 엘리트 농구에서는 4 쿼터를 뛴다. 쿼터당 시간도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코치님과 첫 면담을 했을 때 "카레가 체력은 좋아요." 자신만만 말씀드렸는데, 훈련 몇 번 해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카레, 체력 안 좋아요."
몇 번 지켜본 바 과연, 훈련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쭉 빠져 걷는 시간이 많아지는 초반의 카레였다.
동네 주전에서 엘리트 벤치로 위상이 바뀐 지 약 40일, 카레는 빠르게 코트 공포증에서 벗어나고 있다. 코치님이 "많이 뺏겨봐야 는다."며 뽈을 뺏길지언정 "해 봐! 괜찮아, 해 봐!", "아니, 아예 뺏겨버리려고 해, 뺏겨 버려!" 기꺼이 실패할 용기를 어린 선수에게 주는 덕분이다. 슈팅당하고, 슈팅 실패하고, 총체적 난국에서 "카레야, 잘했어!" 왜 칭찬받는지 어리둥절했을 카레도, 링에 맞은 공이 튕겨져 나오거나 스텝이 꼬여 공을 놓칠 때마다 절레절레 고개 흔들던 우리 부부도 이제는, '무엇이 중헌데'를 조금씩 알아간다.
한 골 한 골 일희일비하며 환호하고 탄성 내지르던 그때와 달리, 뽈을 잡고 선수들 사이로 파고드는 카레가, 키 큰 선수에 위축되지 않고 힘껏 올라차 리바운드 시도하는 카레가, 뺏길 걸 알면서도 드리블하며 골밑으로 돌파하는 카레가 보일 때면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초등 엘리트 농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바뀐 점은, 선수들이 언제 박수를 받아야 하는지를 아는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줘야 할 때 안 주고 주지 말아야 할 때 주는 폐해는 비단 이 세계 이야기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 바뀐 점 하나 더 있다. 동네 M.V.P. 시절 그렇게 나르시시스트처럼 본인 영상 돌려보던 애가,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지 말고 잘 하는 선수 영상 보라고 해도 그렇게 자기 영상을 탐닉하던 애가, 본인 플레이가 구린 것을 알았는지 더 이상 쳐다도 안 본다. 본인 영상 대신 형들 영상 반복하는 모습이 보기에도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