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이름은 '카레', 학교이름은 '포도초등학교'로 각색했으며, 글에 등장하는 학교와 선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코트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가 개입할 수 있는 틈은 없다. 부모는 그저 관중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선수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트 체육에 입성하였다면, 코치 손에 아이를 넘겨준 것이나 진배없다. 운동선수로서 새로운 막을 여는 아이에 대한 책임을 코치에게 이관하겠노라. 부모의 결단은 코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어느 날 오후, 코치님에게 전화가 왔다.
"네, 코치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안부 인사가 이어지고 코치님이 본론을 꺼내신다.
"아, 다름이 아니라, 오늘 학교에서 학교폭력 조사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그런데 카레가 농구부에 학교폭력이 있다고 했는지......." 코치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신음과 탄성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위치할 오묘한 소리가 내 입에서 터졌다. 내 눈은 질끈, 머리가 지끈.
"아, 아니에요, 어머님. 카레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이어, 농구부 창단부터 지금 위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을 기울이신 교장선생님이 걱정을 하셨고, 코치님과 아이의 면담을 통해 아이의 오해(?)를 풀었다며, 집에서도 설명을 잘 좀 해달라고 하신다.
"아후, 코치님,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요."
"나중에 아이에게 이야기 잘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헛웃음이 터졌다. 어른들 입장에서 으레 넘어가는 일이 아이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경기 중 코트 위에는 고성이 오간다. 엄밀히 말하면 오는 것은 없고 가는 것만 있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코치가 내지르는 피드백이다. 처음 초등 경기를 보러 갔을 때 남편이 내게 물었다. "봐바, 앞에 부모가 있어도 저렇게 혼나는 거야. 당신, 할 수 있겠어?"
경기 중 선수는 공개적으로 코치의 질책을 듣는다. 물론 순한 맛이 아닌, 애정 담긴 불닭맛 질책이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혼나려면 혼나야지." 말았는데, 막상 그 상황에 놓이면 좌불안석이 된다. 주전선수인 6학년 형들이 고개 숙이고 열중쉬엇 자세로 코치님께 혼나는 걸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다. 내 아이도 아닌데 마음이 아프고 쓰인다. 상대팀이라도 그렇다.
"짐 싸."
"너, 나가."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선수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 후배, 동료, 부모님, 동료 부모님, 상대팀... 모두가 지켜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질책당한다는 것은 어린 선수에게도 힘든 일일 것이다. 그 인내가 애달프다. 바로 옆에 있는 선수 부모도 무지 신경 쓰인다. 위로를 할 수도, 모른 체할 수도 없는 애매한 지점에서 내 양심은 서성인다.
아이에게 언제나 가르쳤다. 절대 욕 하지 말라고. 욕은 나쁜 거라고.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 눈에 그간 광경은 '이상한 나라의 농구코트'였을 것이다.
야간훈련을 마친 아이와 돌아오는 차 안, 시답잖은 수다에 묻혀 말을 꺼냈다.
"오늘 학폭 조사 있었다며?"
"학폭? 그게 뭐야?"
"음? 오늘 뭐, 농구부에 뭐, 폭력이 있었다고 카레가 말했다던데?"
마치 '저녁 뭐 먹을래?' 묻듯 가볍게.
"아~ 그거?"
지금이다. 이제부터 심리전이다. 자칫 스텐스를 잘못 취하면 아이가 입 꾹 다물고 조개 흉내 낼 수 있다. 억양은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 경쾌하게.
"아, 뭐야아? 어떻게 된 건데?"
그렇게 아이에게 들은 전후사정은 다음과 같다. 엄지손가락이 삐었는지 통증이 있어서 보건실에 갔다. 보건교사는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농구부라는 걸 아니까 한 가지만 확인할게. 혹시 농구부에 폭력이나 욕설이 있니? 아이는 대답한다. 때리지는 않는데 욕은 하세요. 보건교사는 아이에게 빈 종이를 내민다. 코치님이 하신 욕 적어봐.
"그래서 뭘 적었는데?"
"'이 좌식아~'"
[자]도 아닌 [좌] 발음까지 야무지게 살리는 아이 흉내에 결국 나는 이 웃픈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푸하하하하하하! 잠금해제.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다. 이것은 학교폭력이 아니고, 저것은 학교폭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기준 지어 아이에게 설명해야 할까? 농구부 현 상황? 운동부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욕 안 하면 훈련이 안 되느냐고? 글쎄, 이제 막 운동부 세계에 입문한 지 한 달 된 내가 판단하기에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 코치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평소에도 심한 질책이 일상이라면 부모가 감내해야 할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코치님이 선수들과 선수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갓 한 달 된 나도 알고, 안테나 예민한 남편도 알고, 선배 어머니도 알고, 졸업생 아버님도 알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안다. 코치님 찾아 장거리 통학 하는 선수만 해도 몇 명인가.
아아, 언어란, 얼마나 제한적인가. 말로 설명하기보다 느낌으로 아는 추상 영역을 음성과 언어로 구체화시키려니 내 머리가 달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언어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더니, 이 미묘한 차이를 아이에게 설명하기 참 어렵다. 코치님이 하는 욕이 욕은 맞지만 엄마가 말하는 '그' 욕은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결국, 나는 가상의 코트로 들어선다.
봐바, 카레야. 카레가 플레이를 하다가 실수를 했어. 그럴 때 "카레야~ 그렇게 하는 것보다이렇게 해봐~" vs. "야, 카레 이 새끼야!" 둘 중에 뭐가 더 잘 들리냐고 물으니, 풋 웃는다. 긴박하고 흥분된 상황에서는 짧고 강하게 말해야 뇌에 박힌다면서, 전쟁 시 명령도 예를 들어준다.
코치님의 "야, 이 자식아." 속에는 선수들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애정하는 마음이 깔려있다고 설명하며, 그러나 농구부 밖에서의 폭력과 욕설은 그게 누구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때는 오늘처럼 그 사실을 어른에게 말해야 하며, 카레가 오늘 한 일은 사실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응응, 거린다.
이제 10살 아이의 세계에 미숙하고 서투른 엄마의 설명이 어떻게 다가갔을지는 모르겠다. 아이는 농구 코치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어른과 아이 둘 만의 대화이기 때문에 또 다른 어른인 엄마가 알아야 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서 너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 한 가지라도 말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얻어낸 코치님의 한 문장은 내가 설명한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아이가 끝까지 함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면 아이는, 여기저기서 농구부에 대해 물어보니 코치님과 농구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더 이상 아무 말 않는 게 농구부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부모가 아이의 제1보호자라면, 코치는 운동에 있어서 아이의 제1보호자다.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한 상황만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삶이기에, 감독과 코치에 대한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부모는 휘둘릴 테고, 그 희생자는 아이가 될 것이다. 실수투성이 내 아이의 경기 후, 한 소리 하지 않으려고 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코트 위 선수에게 쏟아지는 호통과 질타를 담담하게 관조하는 일, 코트 밖 선수를 그저 보듬어주고 지지하고 쉼터가 되어주는 일, 침묵과 나서야 할 때를 가리는 지혜를 기르는 일이 아닐까? 어렵다. 그..욕이 욕은 맞는데...그 욕은 아니거든... 설명하는 것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