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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ug 02. 2023

내 아이 프로 갈 수 있나요?

※ 아이 이름은 '카레', 학교이름은 '포도초등학교'로 각색했으며, 글에 등장하는 학교와 선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카레가 포도초등학교로 전학한 이래, 눈에 띄게 바뀐 것은 내 일정표다. 개인과 회사 일정만 드문드문 적혀있던 내 달력에 연속 일정을 의미하는 긴 띠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님, 길게 보셔야 해요. 벌써부터 무리하시지 마요." 매주 전지훈련에 따라가는 내게 5학년 선수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씀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도전까지 15년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갓 들어왔을 때는 똘똘한 막내 어머니로 빠릿빠릿 행동하리라, 다짐했더랬다. 그런데 운동부는 6, 5학년 선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학년 선수 부모는 크게 활동할 일이 없었다. 체육관 내 탕비실 청소도, 야간훈련 전 아이들 간식 챙기는 일도, 매일 나오는 유니폼 빨래도, 병원으로, 식당으로 선수들 실어 나르는 일도 6학년 어머님들이 도맡는다. 전지훈련과 대회 동행 역시 주전으로 뛰는 고학년이 되면 부모들이 움직인다. 주전 위주로 케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학년 부모임에도 매주 전지훈련에 따라나서는 이유는 '직관', 그러니까 팬심 때문이다. 주전 선수 플레이를 실시간 영상으로 보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천지차이다. 이주일 전엔 전지훈련(out), 일주일 전에는 홈스테이(in) 제공하느라 진이 빠져서 이번주 전지훈련(out)은 결석하려고 했다가, 영상으로 보는 경기가 성에 안 차서 다음날 남편과 바리바리 쫓아간 적도 있다. 묵직한 철문을 여는 순간 맞는 코트 전경과 차가운 공기가 내 망막을! 내 피부를 직접! 뚫고 들어오는 순간 얼마나 후련하던지.


전지훈련마다 만나는 다른 학교와의 저녁 자리도 유익한 정보의 장이다. 농구 세계 돌아가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코트에서 경쟁자로 만났던 상대 학교 부모님들과의 대화도 색다르다. 방구석 관람을 도무지 참지 못하고 튀어갔던 염소초등학교 경기에서는 염소초 연계학교인 대감중학교 초청을 받아 농구부 급식실에서 중학생 선수 어머니들께 만찬을 대접받고 기숙사도 구경했다.


전지훈련의 다양한 효용 중 으뜸은 그 지역 맛집을 꿰뚫고 계시는 우리 포도초 코치님의 메뉴 선정이다. 지도맵에 '포도초 리스트'를 새로 만들었고 그 안에 매주 차곡차곡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된다.


그러나 이 '점(dot)'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즉, '엘리트 농구'라는 점을 찍을 것인가 결정하기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 적지 않았다. 이 희미한 점이 종래에는 꽤 무거운 질량과 크기를 지닌 점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 점의 주인공, 카레의 재능과 역량 또한 미지수였다. 또한 이 점은 부모인 나와 남편 인생 경로의 점과도 보다 긴밀히 연결될 터였다. 이 점이 안내하는 긴 여정의 끝은 어디일지, 마침내 당도할 저 끝 보이지도 않는 점, 그 '끝'이라는 것이 애당초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가족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이 점을 쾅! 찍는 순간, 지각 변동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이었다.



   

두 달 전인 10살 4월, 의사 출신 원장이 운영하는 입시학원에 카레를 등록하여 '공부하는 엉덩이' 만들기에 돌입했던 남편은 학업이 아닌 운동의 길에서 서성대는 아들을 반대했다. 사실 살아보니 공부가 가성비 갑이며 아웃풋이 정직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남편의 염려도 이해가 되었다. 농구공을 들고 좁디좁은 피라미드에 입장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농구팬이기에 남편이 더 잘 알 터였다. 옆에서 설득하기보다 혼자 고민하게 두었다. 내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답을 찾은 것처럼 남편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스스로에게 설득되어야 예기치 않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까지 미련을 보였지만 결국 남편은 학업이라는 줄을 놓았다.


"남자아이가 초등학교 때
운동부 생활하는 건
진짜 좋은 것 같아."



내 말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빔냉면에 소갈비를 얹힌다. 이어 이슬 맺힌 소맥 잔 두 개가 가볍게 부딪히며 황금빛 파도가 일렁인다. '나중에 카레가 자기 원망할까 봐' 마음을 바꿨다는 이 남자는 지금 열혈 농구대디가 되었다. 열정이 지나치게 넘쳐서 본인 시간이며, 돈이며 농구부에 아주 그냥 퍼...... 아, 이건 나도 할 말 없다.


우리 부부가 초등 엘리트 농구에 만족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아이들이 휴대폰이나 TV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기본적으로 농구부 부원들은 저녁 7시 30분 이후 부모님에게 휴대폰을 반납해야 한다. 한 번은 우리 집에 놀러 온 5학년한테 어머니께 안부전화 드리라고 하니, 저녁 7시 30분이 넘어서 자기 휴대폰을 쓰면 안 된단다. "에이, 아무도 모르는데 그냥 전화드려." 했다가 "안 돼요. 약속이잖아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 녀석 덕분에 내가 양심쓰레기로 느껴진 적이 있다.


3학년 카레에게는 아직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이번 전국대회를 앞두고 전원 7시 30분 이후 휴대폰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카레도 이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보고 참 신통했다.


휴대폰 중독, 게임 중독은 커녕 전자기기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일정표도 한 몫한다. 개학에는 아침 8시 오전 운동, 오후 3시~5시 오후 운동, 저녁 6~9시 야간운동을, 방학에는 아침 9시 30분~오후 5시까지 운동을 한다. 개학에도 방학에도 야간운동은 자율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여한다. 어쩌다가 코치님

이 휴가를 줄 때면 아이들 단톡방에는 심심하다는 메시지가 띠링 띠링 울린다.


"방학 때는 그래도 아침부터 운동하니까 애들 야간까지는 안 하겠죠?"

"그렇겠죠. 애들도 피곤할 테니까 5시면 끝나겠네요."


이런 희망은 애초부터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을 방학 첫날부터 깨닫고 마음을 비웠다. 개학에도, 방학에도 나는 체육관으로 퇴근한다. 저녁 8시가 되면 아이를 압박한다.


"카레야, 이제 그만 가자."

"카레야, 지금 가도 8시 반, 9시야. 저녁 먹고 언제 잘래?"


저녁 8시 30분이 되면 험상궂게 아이를 바라보며 눈으로 욕한다. 그제야 카레는 주섬주섬 유니폼을 벗고 농구화를 갈아 신지만 사복 차림으로 슛을 몇 개 더 던지고 나서야 끝이 난다. 체육관 대기가 지치다가도 '에이, 그래도 집에서 유튜브에 빠져있는 것보다 농구공 튀기는 게 낫지.' 생각하면 마음이 펴진다. 최근에는 노트북을 챙겨 가서 카레 야간운동하는 동안 브런치 글을 쓴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소파에 널브러지기 마련인데, 카레 덕분에 나도 퇴근 후 틈새시간을 활용 중이다.   


전지훈련이나 대회 갈 때 역시 휴대폰 지참 금지다. 처음에는 '힉, 두 세 시간 거리를 뭐 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동해?' 싶었는데 뭐, 애들은 문제없더라. 하긴 내가 어렸을 때도 휴대폰이나 패드 없이도 장거리 여행 잘도 다녔는데 언제부터 영상이 긴 이동시간에 필요한 디폴트값이 되었는지 내가 반성해야 한다.


아이들이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은 예의범절과도 연결이 된다. 체육관에서건, 식당에서건 인사 하나는 기똥차게 잘하고, 어른들 앞에서 비속어 사용도 의식하며 조심한다. 아이들끼리 장난치다가 "아, X나" 했다가도 얼른 입을 막고 죄송하다며 눈치를 보고, 모든 부모님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무언가 챙김을 받은 뒤에는 감사하다고 표현한다.


또한, 한 학년 차이라도 선배에게 존대를 하는데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벌써부터 위계나 기강에 노출된 카레가 안쓰러웠지만 이것 또한 나의 편견이었다. 1학년 막내가 카레에게 "형, 레이싱 게임 하실래요?" 하거나, 카레가 "형들, 저 오늘 좀 늦습니다." 존댓말 쓴다하여 후배가 선배를 대단히 존중을 한다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존대에 의미 부여를 하는 건 나 같은 '으른'만 하는 짓이었다.


외동인 카레에게 형제가 생긴 것도 참 좋다. 강당 단상에 쪼르륵 앉아서 다 같이 수박 주스를 먹거나 골대 아래서 헤드락 걸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카레한테는 동생도, 형도 엄청 많네.'라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다. 그뿐이랴, 홈스테이 문화 덕분에 전국 각지 아는 동생, 아는 친구, 아는 형이 속속들이 생기고 있다. 그야말로 농구로 맺어진 핏줄이다. 외동으로 10년을 큰 카레는 형 간지러움 태우다가 주먹에 맞아서 울기도 하고, 막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툴툴대기도 하며 남자 형제들 사이 복작거리는 맛을 제대로 체험 중이다.  


초등학교 아이들 특유 생기와 짓궂음 또한 에너지 활력소이다. 갯벌에 들어가는 바람에 슬리퍼 바닥에 무거운 진흙 왕창 달고 숙소로 돌아오거나 죄 없는 잠자리나 방아깨비 괴롭힐 때면 속이 터지지만, 대체로 아이들은 귀엽고 천진하다. "어머님, 저는 입 안에 없는 것처럼 카스타드를 먹을 수 있습니다.", "어? 어머님! 키가 몇이세요? 어머님보다 상진이 형 키가 더 큰데요? 둘이 등대고 서 보세요.", "어머님! 제가 매미 잡았어요, 이것 보세요!"

매미랑 소금쟁이를 눈앞에 디밀 때는 정말이지 아득했다. 이럴 때 소스라치면 신나서 더 다가온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기에, 동공 딱 붙들고 눈동자 초점을 빼면 무사히 위기는 지나간다.


통 튀는 탱탱볼처럼 내 정신을 쏙 빼놓지만 코트에서 뽈 주고 받는 모습 보면 꽃게 잡을거라고 죽어도 숙소로 안 가던 아까 걔네가 맞나 싶다. 어린이 선수라는 세계에 한 번 빠지면 답 없다.


가리지 않고 먹게 되는 식사도 좋은 점이다. 포도초 코치님은 특히 먹는 것에 진심이어서 전지훈련을 가면 아이들 특식을 꼭 먹게 한다. 운동부니까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코치님이 유독 챙기는 편이다. 이번 영광대회 때는 백합죽과 굴비정식을 특식으로 먹었는데 다른 학교는 매번 백반만 먹거나, 애들 백합죽이나 굴비 정식을 먹이자 해도 '생선 가시 발라주기 귀찮다', '조개는 비리다'는 이유로 학부모가 거절했다는 후일담도 전해 들었다. 애들 특성상 단체로 먹으면 평소 안 먹는 음식도 먹는다. 빨간 국물은 입도 안 대던 카레도 김치찌개와 굴비조림을 먹고 얼마 전에는 추어탕까지 먹을 뻔! 했다가 메뉴가 바뀌어 다음 기회로 기약.


먹는 것에 진심인 코치님 덕분에 빼빼 말랐던 1학년 선수는 1년 만에 8kg가 쪘다고 한다. 카레는 한 달 새 2cm가 컸고 발이 커져 240mm 내 운동화를 물려주었다. 4학년 때 등빨 좋았다던 선수는 쭉 길어져서 6학년 현재 늘씬한 몸으로 센터를 책임지고 있다. 이런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부모들까지 덩달아 덩치들이 점점 좋아지는 건 당연지사. 모두 평균 5kg는 쪘다고 하여 조심하고 있지만 '포도초 맛집 리스트'는 언제나 숟가락을 들게 만든다.    

    

저학년은 옆으로 크고 고학년은 위로 크는 것이 신체만이 아니다. 아이들 플레이하는 걸 보면 한 달 전과 또 다르다. 포도초 코치님 스타일은 한 명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그다음 아이를 키우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결과가 놀랍다. 한 명, 한 명 빌드업하는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팀 전체 기량이 올라갈 것이다. 그 결과 올해 전국대회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눈물의 집중 스파르타'를 거친 아이들 모두 명문 중학교 진학을 준비 중이다.


남편도 편해졌다. 맨날 아빠한테 전화해서 아빠 어디냐, 언제 오냐, 같이 농구하자, 평일주말, 낮밤 가리지 않는 카레 때문에 남편은 피곤하고, 아빠가 안 되는 날 혼자 연습하는 카레는 안쓰럽고 그랬는데 지금은 모두가 행복하다.


언제나 리딩을 하다가 뒤로 물러나 지원하는 역할을 배우는 것도 내게는 수확이다. 그동안 수 번의 전지훈련과 대회에서 귀동냥으로 배운 바, 이 세계에서의 지혜로움은 바로 '조용한 겸손'이었다. 일반 기업이나 조직에서의 진두지휘는 리더십과 추진력으로 평가받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이 세계에서 '시끄러운' 학부모는 아이 레퍼런스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자리에서건 내 아이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 자칫 넘을 수 있는 살뜰과 유난의 선을 의식적으로 경계하며, 무엇보다 다 함께 크는 아이 들인 만큼 지나치게 경쟁심에 불타올라 타 학교나 선수를 비방하는 행동, 특히 코트에서 "쟤 슛 없어!" 소리치는 등 성장하는 선수에게 상처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선수들이 소중한 만큼 다른 학교 선수들도 소중한 인재이며 언젠가 함께 뛸 동료이기 때문이다.        




카레가 포도초등학교를 만난 일련의 과정을 회상하면 케케묵은 표현이지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도초등학교와의 만남이 세 가족 개개인의 생애에 있어 저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함의하는 '한 점(dot)'으로의 발현은 분명하다. 이 점은 삶이 초대한 곳이며, 또 다른 생애사건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중고등학교고 대학이고 프로고 나중 일은 모르겠고 예의, 예절, 마인드, 체력, 멤버십, 팀웍, 식사, 질서, 인내 등을 배우고 있는 10살 여름, 딱 좋다.


매우 만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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