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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Sep 16. 2023

나는 몰랐지, 농구는 '대학'이라는 걸.

※ 아이 이름은 '카레', 학교이름은 '포도초등학교'로 각색했으며, 글에 등장하는 학교와 선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시원한 소맥에, 담백한 갈빗살에, 부부의 오랜만 술자리에 기분이 들뜬다. 카레 이야기, 농구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남편이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여보, 석현이가 나중에 카레 삼성에 넣어준대."

"삼성?"

"어, 삼성에 프로농구!"


석현이는 삼성전자에 다니는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다.


"그렇게 프로 가면 다 프로 가게? 제발 자중해, 카레 농구한다고 동네방네 떠들지 말고."


왠지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남편에게 빽! 쏘았다. 싸늘한 내 반응에 남편은 농담도 못 하냐며, 고개 훽 돌리고 고기만 먹는다. 하,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야, 카레 첫 농구공 내가 사준 거 알지? 나중에 꼭 내 얘기하라고 해라.", "지금 우리 노후가 카레한테 달려 있다고. 카레 빌딩 세우면 나 사무실 하나 줘야 된다?" 류의 덕담(?)은 내 아이가 농구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라면 으레 던지는 단골 멘트다. 삼성전자-삼성구단. 이 단순하고도 경이로운 연결고리를 배꼽친구 둘이 그냥 놔뒀을 리 없다.


여기다 대고 "야, 빌딩은 아무나 세우냐? 다 서장훈처럼 되는 줄 알아?"라고 받아친 셈이나 다름없으니 남편 입장에선 봉변이다. 게다가 '카레 농구한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치는 브런치 글 쓰고 유튜브 농구 로그 올리는 나인데, 절친과의 대화를 두고 세상 경거망동, 입방정 몰이를 해댔으니!


예능을 다큐로 받은 나, 왜 이렇게 예민하지?







이건 다 웹툰 <가비지 타임> 때문이다! 한국 고교 농구 현실 고증을 오지게 담고 있는 스포츠만화답게 회를 거듭할수록 재미와 상응하는 충격도 동반했다. 농구와 대학 진학의 상관관계를 나는 생전 몰랐던 것이다. 야구나 축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 선수로 활동하지만 유독 농구는 대학 진학을 거쳐 프로 진출을 한다. 얼리 엔트리 제도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 선수도 프로 농구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만, 대부분 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 농구팀에 입단한다.


*드래프트 : 신인 지명회. 각 구단이 순번 추첨을 통해 신인을 지명하여 계약한다.


일평생 농구만 하던 아이들이 프로 구단에 지명받지 못하면 먹고 살기 요원한 현실을 방어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대학 졸업장이라도 따놓으라는 배려다. 농구는 원체 시장 규모도 작고(기껏해야 5명이 뛴다), 지역 연고도 없으며(야구는 지역 연고가 잘 되어 있어 은퇴 이후 경력이 이어질 수 있다), 2군 리그를 운영하지 않는 구단도 많으니(야구는 2군, 3군이 있다), 대졸 간판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감독은 선수들의 대학 진학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가비지타임 42화 중


대한민국 대학 입시가 고3에게 호락호락한 적이 있던가? '인서울'을 목표로 학업에 매진하는 고3 생활도 눈물겨운데, 고등학교 농구선수의 입시는 더욱 혹독하다. 이들은 체대 특기생 전형을 통해 대학의 체육 관련 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바늘구멍' 입시다.    


2022년 12개 대학 체육 특기자(농구) 선발 인원은 남자 대학부 기준 총 62명, 중고농구연맹 등록 고등학교 3학년 선수는 총 96명. 단순 계산하면 경쟁률이 1.5:1이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고? 그럼 왜 SKY캐슬에 특기생 전형은 없는 걸까? 각 대학은 가드, 포워드, 센터 포지션 별로 선수를 선발하는데, 선수는 '한 개 포지션만' 선택할 수 있다. 2022년 TO를 살펴보면 가드 포지션이 12명, 센터 포지션이 3명이었으니, 만약 카레가 올해 고3이었다면 단 12개의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후덜덜.


게다가 모든 선수가 대학 지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실적을 쌓아야 하는데 지원 조건이 요즘말로 킹 받는다. 국가대표나 청소년대표로 선발되거나(태극마크 달기 참 쉽죠잉?), 전국규모 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하거나(=전국에서 킹왕짱 먹거나). 개인 기량으로 비비기 힘들면 팀역량에 기대는 방법도 있는데 고등학교 3년 이내 8강에 한 번이라도 들면 된다. 이 말인즉슨, 내가 속한 팀이 전국에서 8등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자기가 속한 조직이 전국 8등 안에 들 가능성은?). 이에 해당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없다면 원서조차 낼 수 없다.


가비지타임 15화 중



이 과정에서 대학이 유망주를 데리고 오기 위해 기량 미달인 3학년 선수들을 함께 받아주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농구계의 끼워 팔기 즉, '업둥이' 에피소드를 <가비지타임>에서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은 받았지만 인지부조화는 곧 균형을 찾았다. 왜, 연예계에도 주연급 캐스팅될 때 신인이나 조연급이 동반 캐스팅 되는 소위 '끼워 팔기'가 있지 않은가?


한데, 겨우 맞춘 인지조화는 곧 와장창 깨져버렸다.     


인서울 네임드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농구선수 생활은 끝이 난다?


전혀 예측하지 못전개였다. 카레는 중고등학교 농구부에 진학할 것이고, 열심히 하다 보면 농구선수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머릿속 꽃밭이 완벽히 망가져버린 것이다. 카레가 대학에서 서로 데려가고자 하는 유망주가 아니라, 업둥이면 어떡하지? 게다가 업둥이로 입학시켰으면 벤치선수로라도 남기지 왜 농구부를 탈퇴하게 하는 건데?


<가비지타임>은 친절히 알려준다. 그야 기량 미달인 업둥이들이 농구부 정원을 채우고 있다간 뒤에 들어올 우수한 선수들을 못 받게 되니까,라고.


최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유망주가 업둥이를 받아주는 조건을 제시하는 한 두 단계 아래 등급의 대학에 지망하고, 업둥이들은 농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진학률'이다.





태극마크를 달던, 개인상을 받던, 8강에 들던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하면 끝일까? 천만에! 피라미드 꼭대기는 점점 좁아진다. 2022년 기준, KBL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4학년이 29명, 얼리 드래프트 신청 10명, 이중 20명 안팎이 프로에 진출한다. 즉 매년 스무 명 남짓 뽑는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면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포도초 코치님의 네트워크 덕분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 농구부까지 두루두루 만난다. 이 선수들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부터 31일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쏟아붓는 땀과 에너지는 감히 상상도 못 한다. 최소 10년 이상 인생을 갈아 넣는 농구라는 놈이 대체 뭐길래, 휠체어를 타더라도 끝까지 농구할 거라던 연골이 다 닳아버린 그 선수는 대체 무슨 미래를 담보하길래, 이토록 시장이 작으면서 왜 농구판은 속절없이 유소년들을 키워내고 종국에는 좌절을 주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카레 앞에 닥칠 이 냉혹한 현실을 아무런 방어도 없이 조우했으니 내 멘탈이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면에 시커멓게 똬리 튼 거대한 불안이 '내 친구 삼성맨~ 카레는 삼성구단~' 조악한 논리의 실없는 농담 앞에 맥없이 터져버린 것이다. 지랄맞은 급발진에 비록 남편은 된서리 맞았지만 낌새 없이 내 안에 숨어든 불안과 무기력의 근원을 알아챈 것은 와중의 득이라면 득일까?





종종 유망주 소리 들었던 왕년의 학생 농구스타 근황을 찾아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해진다. 대학 진학 후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해서, 에이스형 가드들을 마구잡이로 수집한 대학의 중복 스카우트 때문에 꾸준한 출장시간을 얻지 못해서, 감독의 폭력을 참지 못하고 팀을 이탈해서, 제대 후 팀 내 포지션 포화상태여서, 부상당해서, 2군 리그 운영이 지지부진해서...... 저마다 다른 이유로 에이스였고, MVP였던 많은 선수가 사라졌다.


명성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농구에 정이 떨어졌을까, 아니면 농구에 미련이 남았을까? 취미로라도 농구공을 잡을까,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을까? 농구를 열정으로 추억할까, 배신으로 기억할까?



<가비지타임> 인물들의 서사가 만화적 논픽션이 아님을 작가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취재를 바탕으로 현재 대한민국 '입시 농구'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고 독자들은 저마다 이 인물이 재현하는 실존인물을 유추한다. 어쨌거나 독자들 입에 오르내리는 선수들은 그래도, 농구선수로서 존재한 이들이다.       


많은 독자가 '업둥이' 신유고 조신우의 선택을 응원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할 것 없이 농구선수를 볼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부디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신기루 같은 바람인 걸 알지만 이들의 성실과 최선에 보상이 따르기를, 그러한 시간의 도래를 믿고 싶다.


어느 날, 업둥이 에피소드를 남편에게 보여주니 남편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깊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만약 카레가 중도 이탈을 한다면 정규교육과정을 잠깐 스탑하고 카레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겠노라! 남편에게 선언했다. 그동안 농구코트에서만 사느라 농구가 다인줄 아는 아이에게 이렇게 크고 다채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안 그래도 처진 눈이 더 처져버린 남편이 나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받는다.


"그래도 대학은 보내야지..."


못 살아. 업둥이 제안 받을 사람 여깄네, 여깄어! 입시학원 보내던 가락 어디 안 가네, 으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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