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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an 29. 2024

코트보다 벤치행이 반가운 선수

※ 아이 이름은 '카레', 학교이름은 '포도초등학교'로 각색했으며, 글에 등장하는 학교와 선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2023년10월에 개최되는 유소년전국농구대회를 앞두고 아이들은 날마다 연습경기에 특훈 중이다.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 카레에게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혹독한 시간이다. 특히 3일 연속 치르는 다른 학교와의 연습경기를 두려워했는데 이틀 째 되는 날은 "이제 하루만 더 견디면 돼?",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하며 극도의 부담을 넘어 노이로제에 가까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연습경기가 계속되던 어느 날 아침엔 침대에 누운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다.


"카레야, 겨우 3학년인데 아무도 카레에게 6학년 형처럼 잘할 거라는 기대 안 해. 편하게 해도 돼. 코치님도 볼 100번 뺏겨도 된다고 그러셨잖아. 지금은 많이 뺏기는 게 카레가 해야 되는 일이야. 카레야, 연습경기가 그렇게 부담이 돼? 연습경기는 숙제 같은 거야~ 숙제에서 틀린다고 해서 큰일 나? 아니잖아~ 토닥토닥~" 해도 그때만 반짝 위안받는 느낌이더니,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리며 누워 있는 자식 보는 이 마음!


카레를 꼭 끌어안고 함께 누워 있는데 어젯밤 본 웹툰 <가비지타임>이 떠오른다. 마침 또 업데이트된 내용에 카레의 마음과 상황을 비유한 장면이 나온다. 나 정말 <가비지타임>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카레야, 가비지타임 같이 볼래? 어제 업데잇 돼서 봤는데 너~무 스릴 넘치고 재밌는 거 있지?" 네이버웹툰 어플을 열고 해당 회차를 클릭한다. 등장인물들의 스토리를 풀어서 이야기해 주니 대답은 하지 않지만 카레 눈은 웹툰에 고정되어 있다. 행여나 아이 마음이나 상황에 빗대어 조언 혹은 틈새 훈육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웹툰 스토리만 따라간다.


극적인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자 카레 입에서 "우와..." 하는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온다. 부정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정서로 전환된 것 같아 그제야 카레에게 하고 싶은 말 한 두 마디를 얹힌다.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그럼, 이제 학교 갈까?" 그렇게 카레를 체육관으로 데려다 놓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알람도 없이 서는  체육관에 1등으로 가고 싶다며 아침마다 엄마를 닥달하느라 종종 혼나기까지 하는 카레가 어찌 된 영문인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카레를 깨우기 위해 가보니 오잉? 벌써 깨어있다. 눈만 뜨고 멍 때린 채-


그때처럼 울지도 않고, 왜 연습경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속 터지게 만드는 불평불만도 쏟아내지 않고, 부담된다 오버하며 오두방정 떨지도 않고, 그저 침묵 속에 아이가 있다.


침묵이 찾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침묵에 동행하는 것뿐. 아이 옆에 가로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아이 어깨를 끌어당겨 가슴팍에 품는다. 가만히 아이 등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퍼질 뿐이다.


토닥-

토닥-


그러고 있으니 카레가 주절주절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엄마, 나 농구 언제든 그만둬도 돼?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수업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고 싶어. 수업 끝나고 체육관만 생각하면 어지럽고 그래. 그냥 농구교실 가서 편하게, 취미로 농구할까?


혼란하게 터져 나오는 아이 말이 사라졌을 때쯤 물었다.

"농구, 잠깐만 쉴래?"

잠깐 멈칫, 이내 끄덕끄덕.


"알았어, 엄마가 코치님이랑 상담해 볼게."

"응. 그런데 엄마........ 코치님이 그럴 거면 그냥 농구 관두라고 하면 어떡해?"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해?"

"왠지 코치님은 그러실 것 같아."

"절대 그러실 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너, 그럴 거면 농구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라고 형들에게 호통 치는 코치님이 생각났나 보다. 아이들이 순수한 것은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코치님 말씀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코치님은 종종 충격요법을 쓰시는데 그중 하나가 짐 싸서 집에 가라고 하는 전략이다. 진짜로 집에 보내버릴 때도 있다. 물론 미리 부모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이후 전화를 하여 의도를 설명하신다.


"집에 가, 인마! 짐 싸! 안 가?" 호통 치는 코치님 앞에서 아이들은 "아닙니다! 아닙니다!"를 외치며 버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정말로 집에 가 버린 사건이 있었다고. 코치님도 당황하고 부모님도 당황하고 그 이야기를 훗날 전해 들은 나는 배꼽 빠지게 웃고. 당시 나는 그 아이가 소위 '빡쳐서' 집에 가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초등학생 선수들과 지내보니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중을, 속셈을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버티고 서 있어도 코치님께서 계속 집에 가라고 하시니 그쯤이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계속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답하는 것도 어른에게 반항하는 것 같고, 아, 진짜 집에 가라는 말씀이시구나,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진 심장을 안고 뒤돌아서는 것이다.


 '농구를 쉬고 싶은 거지,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닌' 카레의 의지가 한편으로 고맙다. 그리고 다행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나는 연차를, 카레는 결석을 선택! 마침 카레 옷들도 작아졌겠다, 쇼핑몰에 가서 카레와 신나게 쇼핑을 하는데 코치님께 전화가 온다. 농구부 엄마들 단톡방에 이러저러 상황을 남겼더니 총무님이 코치님에게 말씀하셨나 보다.


"원래 애들 그런 시기가 와요, 어머님. 동계훈련 끝나면 이제 관둔다 할걸요? 유지도, 태지도, 우진이도 번은 관둔다 했고 졸업생 현우는 집 앞에 데리러 간 게 8번은 돼요."  

 

어린 선수들에게 찾아오는 고비에 대해 선배 부모님들께 익히 들어온 터라 저는 크게 걱정 안 한다고 말씀드렸다. 코치님과의 통화에 귀가 이만~큼 커진 카레가 전화를 끊자마자 궁금해한다.


"엄마! 코치님이 뭐래?"

"5, 6학년 형들도 다 카레 같은 시간을 겪었대. 유지 형도, 우진이 형도, 지혁이 형도 다 그랬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고, 실제로 대수롭지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대답을 해주었는데 카레 반응이 의외다.

"진짜? 형들도 진짜 그랬대?"


그 멋지고 대단해 보이는 6학년 형들도 자기와 같은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에 크게 놀란 눈치다. 자기만 힘들고 두려운 게 아니라 형들도 그랬구나, 무언가 안심되고 정리되는 듯한 표정이 카레 얼굴로 퍼졌다. 그 순간 나는 망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거구나! 아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 거구나!


이런저런 새 옷 입어보며 "우와, 우와" 하던 카레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나를 재촉한다. 빨리 체육관 가자고. 재기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상하목장 우유로 만들었다는 무려 4,500원짜리 콘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이고 학교로 향했다.


"농구가 무섭다는 애가 학교는 빠져놓고 체육관에는 오네요?" 머쓱하게 들어서는 카레를 발견하신 코치님이 농을 친다.

  



원래 3학년이면 형들 옆에서 드리블이나 치면서 노는 시기인데, 카레는 내년부터 뛰어야 하니까 훈련을 하는 거라고, 중간중간 빼주는데도 훈련이 힘들 수 있다고, 그럴 때는 2~3일 쉬어도 되지만 쉴 때도 체육관에 나와서 형들 하는 거 보면서 쉬는 게 공부라며, 코치님이 나중에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우리는 아이에게 말한다.

"카레야, 원래 주전은 6학년부터인데 벌써부터 경기 뛰게 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워. 진짜 운 좋은 거야. 뛰는 만큼 느는 게 농구인데 겨우 3학년, 4학년 짜리가 형들이랑 같이 뛰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 고맙습니다~ 하고 뛰어."


이건 순전히 어른들 생각이다. 아이들은 코트보다 벤치를 좋아한다. 아직 초등학생인 유소년 선수들은 경기출전시간이 긴 게 싫다. 나 언제 교체해 주지, 나 언제 들어가게 해 주지, 애타게 콜을 기다린다. 그런 심리를 알기에 코치님은 "너 지금처럼 뛰면 절대 교체 안 해 줄 거야."라는 이상한 주문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 선수들이 들으면 희한한 상황이다. '너 절대 벤치로 안 부르고 계속 코트에서 뛰게 할 거야'라는 은혜로운 말이 초등 선수에게는 반갑지 않은 말이라니.

  

'선수'라는 가면 뒤에 가려져 있지만 코트에서 날고뛰는 아이들도 원래 '어린이'다. 5학년 한 명은 "어머님, 코트에 들어가면 손이 벌벌 떨려요."라고 고백한다. 어른들도 사회생활하며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걸 부담스러워하면서 왜 아이들에게는 "너 좋은 기회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뛰어."라고 쉽게 말할까? 공을 빼앗길까 봐, 자유투를 실패할까 봐, 패스를 놓칠까 봐, 레이업 슛이 들어가지 않을까 봐, 어느 종목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스포츠를 수행하며 어린 선수가 받는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다음 날 연습경기가 끝나고 코치님이 말씀하신다. "어머님, 카레 몸이 가벼운데요?" 확실히 중압감을 느끼던 경기들의 플레이와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카레가 경기 소감을 전한다.

"몸이 풀리고 나니까 이상하게 재밌으면서 게임 같더라?"


한참 코트를 두려워하던 카레에게 "그냥 농구교실에서 했던 게임이라고 생각해 봐. 너 게임 좋아했잖아."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또 어느 날은 "엄마, 비하인드 드리블을 했는데 깜쪽같이 공이 사라진 거야. 어떻게 바로 뺏기냐? 으아." 쫑알대길래 "그래도 백드리블 시도도 해보고 대단한데?"라고 하니 그런다.

"엄마가 연습경기는 해보고 싶던 거 실험하고 시도해보는 시간이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해봤지!"


계단(階段)  

1.     명사 사람이 오르내리기 위하여 건물이나 비탈에 만든 층층대.   

2.     명사 어떤 일을 이루는 데에 밟아 거쳐야 할 차례나 순서.   

3.     명사 오르내리기 위하여 건물이나 비탈에 만든 층층대의 낱낱의 단을 세는 단위   


앞으로 무수한 날을 맞이할 것이다. 계단의 발판이 길어질 날을, 여기가 혹시 마지막 계단인가 싶을 날을, 유독 계단의 높이가 높은 층이었구나 깨닫는 날을, 이어지는 계단에 질리는 날을, 그럴 땐 아이와 함께 제자리에 주저앉아 계단을 전망대 삼아 풍경을 구경하련다. 어깨 으쓱, 엉덩이 털고 아이가 일어나면 나도 뒤따라 일어나 아이 속도에 맞추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련다. 이 아이가 벤치가 아닌 코트를 더 좋아하게 될 그 계단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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