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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Aug 29. 2021

난 여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여성 혐오가 웬말이냐고?

[편성준의 리뷰]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

사진과 본문 내용은 상관 없습니다


주인공이 달린다. 그는 지금 악당이나 나쁜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다. 골목길을 달리던 그는 마침 눈에 띈 식당의 뒷문을 열고 수증기가 서려 있는 주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런데 낯선 침입자를 본 주방 보조가 "에에~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어서 나가요!"라며 그를 저지한다. 주방 보조는 영어도 서툴고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중국계 미국인인데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그 직원을 미워하게 된다. ‘아, 저 눈치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 놈 때문에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겠네!’ 사실 그 중국계 미국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저 자신의 직분을 다했을 뿐인데도 그는 결국 관객의 미움을 사는 것이다.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는 주인공이 주방 보조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린 뒤 무사히 그곳을 벗어나고 나면 관객들은 비로소 박수를 친다....... 


예전에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양인을 폄하할 때 쓰는 대표적인 설정은 이런 식이었다. 백인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원인을 엉뚱하게 동양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영화에서 보이는 이런 인종적 편견이나 혐오는 사정이 많이 나아진 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오래되고 끈질긴 편견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으니 바로 ‘여성혐오다.


저자 잭 홀런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인 여성 혐오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추적 가능한 모든 지식과 통찰들을 전한다.


도대체 지구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여성 혐오’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의 저자 잭 홀런드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원론과 판도라의 상자 신화에서부터 여성 혐오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성은 자연, 남성은 정신이나 영혼으로 보는 이원론이 팽배했다. 신이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남자가 여자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보내진 여성 판도라는 신이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상자를 기어이 열어봄으로써 그때부터 인간은 평생 노동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들거나 병들어 죽는 운명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건 주인공을 방해하는 영화 속 중국인에 비하면 수천수만 배 황당하고 억울한 설정인데도 그대로 역사가 되었고 아직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에피소드를 자신의 글과 말에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창시했지만 동시에 여성 혐오로도 최고인 도시국가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상자를 기어이 열어봄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누명을 쓴 판도라는 처음부터 '교활한 태도와 암캐의 마음'을 가진 존재로 왜곡되어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한 얘기는 또 있다. 신과 아무런 문제없이 소통하며 에덴동산에 입주해 완벽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뒤늦게 부끄러움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불행의 역사를 걸어가게 되었다는 설이다. 무려 인류 ‘원죄’의 원인 제공자로 최초의 여성인 하와를 지목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황당한 주장을 담은 구약성서 창세기 편이 세계 20억 기독교인 신앙의 중심인 까닭에 아직도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 정도는 인류 불행과 고통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이 신화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진짜 있었던 이야기처럼 여기며 큰다는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엔 분명 남자와 여자가 공존하는데도 남을 홀려 불행에 빠트리거나 죄악을 만드는 것은 죄다 여성이 도맡아야 하는 죄목이고 남자는 그저 선의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아이디어는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게 통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고 마녀 재판이 횡횡하던 중세에는 단지 어이가 없는 걸 넘어 많은 여자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는 전제주의적 교회에 의해 6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고발당한 사람은 누가 고발했는지 알 수 없었으며 심문관에겐 속임수나 거짓말이 허용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자체가 마녀라는 증거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악령은 마녀에게만 깃들고 마남(심지어 이런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은 비껴가는 걸까. 마녀 사냥은 관찰 불가능한 악령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당시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 이벤트였다. 그런데 성욕을 죄악시해서 결혼의 목적조차도 ‘욕정의 방어수단’으로만 여겼던 초기 기독교 남성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희생양이 바로 ‘음란한 마녀’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성 혐오는 오랫동안 기독교 사상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악령은 왜 하필 마녀들에게만 깃들었던 것일까?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6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이쯤 되면 왜 ‘꽃뱀’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암놈만 있고 수놈은 존재하지 않는 생물인 것처럼 취급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역사적으로 똑똑한 여자들은 모두 음란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가졌던 클레오파트라가 오럴 섹스를 좋아하는 음란녀로 각색된 건 이런 이유에서였고 이런 여성에 대한 공포심은 반유대주의와 결합해 히틀러 시대의 여성 혐오로 다시 태어났다. 나치가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해서 유태계 독일인들을 비인간화했듯이 탈레반이 제정한 법들은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밀어냈고 아랍 여성들은 지금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채 브루카 속에서 눈만 내놓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시작되고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견고하게 자리를 잡은 여성 혐오는 너무 오랫동안 그 명맥이 유지되는 바람에 현대 남성들이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그러나 그냥 남자 여자가 사이좋게 지내면 될 것은 왜 페미니즘 논쟁을 벌여가며 싸워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전 따뜻해서 좋던데요?”라고 대답하는 응시생만큼이나 한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서 행하는 것만큼이나 모르고 행하는 것도 죄다. 그리고 예전엔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좋은 책과 영상이 너무나 많다. 많은 훌륭한 페미니즘 콘텐츠가 그랬듯이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 같은 책을 읽는 것도 결국은 여성이 유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녀 모두가 평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딛는 첫걸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이다. 처음에 ‘여성 혐오에 대한 글을 남자가 쓰다니?’라는 반응을 접한 잭 홀런드는 “왜 안 되죠? 여성 혐오도 남자가 발명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다 쓰고 한 달이 지나 암 선고를 받았고 2개월 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딸이 쓴 서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도 맨해튼 병원의 환자 휴게실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원고를 검토했다고 한다. 상상해 보면 참 따뜻하고 뜻깊은 장면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이 책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세상의 남녀 모두를 위해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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