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의 경찰이지만, 기획자도 회사원이다.
회사의 방향성과 기획자의 생각이 같지 않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면접 준비를 하는 모의 면접 클래스를 진행한 적이 있다. 면접관의 역할로 예비 기획자들에게 이 질문을 해봤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회사의 전략과 방향과 기획자 개인의 판단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항상 회사의 방향을 명확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움직이며 좋겠지만, 어떤 때는 그럴 기회조차 없이 일이 마구 쏟아져 내릴 때도 있다. 특히 회사가 크면 클수록 최초 전략 설정자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 그림자만 덮쳐오기도 한다.
그런 날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거의 진행이 되지 않았다. 새로 진행해야 되는 일인 줄은 알겠는데 마음이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공감이 가지 않으니 상상도 되지 않고 아이디어도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기운도 없고 얼굴 표정도 어두워진다. 나는 유난히 그런 편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만난 기획자들은 대부분 그런 편이었다. 밥을 먹을 때 혹은 차를 마시면서 수많은 '숙제'에 분노했다. 기획의 의지가 꺾이는 수많은 사항에 대해 유감의 표현을 들어왔다.
저는 무조건 회사의 방향에 따르겠습니다
모의 면접하는 학생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 친구의 설명으로는 일단 면접이기 때문에 회사의 방향에 대해서 따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야 될 것 같았다고 했다.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도리어 기획자 면접이기에 이 답변이 적절한지 의심이 갔다.
기획자를 다른 말로는 Product manager 또는 Product owner라고도 한다. 하나의 프로덕트에 대하여 고객의 경험과 IT역량, 그리고 비즈니스까지 고려해야 하는 존재다.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만약 회사의 높으신 분에서 게 어떠한 결정이 내려왔다면 이 말을 그대로 빠르게 실천하는 것이 가장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일까? 일단 듣는 순간부터 기분이 상했다고 아예 등 돌릴 수만도 없다.
가장 먼저 기본적인 역할을 기준으로 몇 가지 항목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프로덕트의 기존 경험을 해치거나 방해할 것 같은가?
불필요한 IT자원 낭비가 일어나거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내용이 내려오진 않았는가? 혹은 장기적으로 IT 관리 이슈가 발생하진 않는가?
비즈니스적으로 봤을 때 전략의 논리가 명확한가? 혹은 중요 비즈니스 모델의 수익구조를 방해하거나 하진 않은가?
만약 이 세 가지 차원에서 격렬하게 반대할 사유가 있다면 분명한 이슈 제기는 필요하다. 물론 아주 이성적인 입장에서 최종적인 의사결정자에게 정확한 의사결정의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획자가 이 부분에서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다면 마지막까지 프로덕트의 사상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기획자의 역량이 더 중요한 작은 기업일수록 무조건 회사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전문가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면 논의와 이슈 제기해줄 용기가 있는 기획자임을 보여주는 편이 더 면접에서 적합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명확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트렌드가 좀...
그 때는 기획자 양심에 걸릴만한 명확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고 오신 팀장님의 표정도 어두웠지만 결국 지고 오신 모양이었다. 결국 한 달 동안 진행해왔던 기획을 뒤엎고 일주일 만에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사이트 메인을 따라 하는 기획을 다시 해야 했다.
분명 UI 트렌드는 바뀔 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영업과 마케팅에서 늦었지만 1등의 전략을 따라가길 바랬다. 명분도 내용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너무 나빴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기획한 기획안이 너무 쉽게 무너져야 했기에 속이 상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기획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스스로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설득을 할 수 없이 애매한 것이라면 설령 스스로의 감각이 맞았다고 해도 자기주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풀이 잔뜩 죽어서 사무실에 혼자 남아 투덜거리며 기획을 고치는 나에게 팀장님은 멋쩍게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기획자의 소신이 가장 중요하긴 한데
설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가끔은 회사원일 때도 있어야 하더라.
만약 네가 옳다면 돌아서라도 다시 올 거야.
당시 내 연차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 말의 무게감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지시는 곧 오래가지 못하고 또다시 개선이 되었다. 처음 내가 기획했던 것과 비슷한 그 형태로.
가끔 '회사'에 살고 있는 기획자들은 프로덕트에 대해 옳은 길을 알고도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직관에 의한 트렌드에 관한 문제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모두가 동일한 정보의 양을 습득하지 않았기에 모든 의사결정 관계자가 담당 기획자만큼 습득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하니까. 결국은 돌고 돌아 사고의 실패를 겪은 뒤에 나의 의견에 동의해줄 때까지 조금 기다려줘야 한다. 회사는 혼자 다니는 곳은 아니니까.
물론 반대의 이유로도 기획자는 회사원임을 인정해야 할 수도 있다. 혹시 회사원이라는 안락함에 기획자임에도 더 공부하지 않고 나만 과거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기획자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관심 갖지 않는다면 기획력과 트렌드함은 무뎌져 버릴 수 있다. '기획자를 무시하냐?'는 뾰족한 생각보다 어쩌면 더 필요한 건 '반성'일 때도 있다.
모두와 함께 가는 회사원이지만 때론 날카로운 경찰이 되는 것, 그것은 프로덕트를 지키는 기획자의 보통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