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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나 Sep 21. 2016

잔향

여운을 주는 사람


향수를 뿌려


손목에 한 번

귀 뒤에 한 번


그래

단 한 번이면 충분했어

당신은 그 한 번으로 날 기억했어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말했었지

향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향이 없는 것은 기억을 앗아간다고


나는 불안했어

향기를 나에게 여러 번 입히기 시작했지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내게 아무 향이 안 난다고 했어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어






한 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가 날 기억한다면.


그 기억 속의 나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힘없고, 볼품없는.

그런 별로인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날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향기가 나지 않는 조화처럼.

살아있지 않은 조화처럼.


향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말만 했다.

말도 행동도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 않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고.

나의 행동을 주시했고.

나의 말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강렬한 사람이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궁금한 사람이 된다는 것.


내 걱정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내 걱정보다 훨씬 달콤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돋보여야지.


강렬한 향수처럼.

향을 뿜어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때부터.

내가 변한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동.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투.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짓말.


나는 생각보다 빨리 습득해갔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내 모든 행동이 타인의 기준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좋아해 주기 시작했다.


내 향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을 뿜을수록.


내 원래 향이 기억나질 않았다.

내 원래 향을 잃어갔다.


나는 어느새.

너무나 진한 향을 뿜고 있었다.


그 향은 너무나 진해서, 아니 독해서.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곧 내 주변 이들의 감각도 마비시켰다.


나는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잊혀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누군가의 낯선 향을 맡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 그에게선 아무 향이 나질 않았었다.


아무 향이 나지 않는 사람.

나의 기억에 남지 않을,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잔잔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잔잔한 향이 베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향이었다.

그 사람의 잔향(殘香)이었다.







말이 너무 많지도

말이 너무 없지도 않은

그 사람은


평범해 보이지만 맑은 눈을 지녔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똑 부러진 입을 지녔다.


나를 쑥스러워하지만 바로 쳐다보고

나를 어려워하지만 바로 말한다.


그 누구보다 눈에 띄지 않고

그 누구보다 평범하지만

자신감 있다.


그 사람만의 부드러움과 따뜻한 배려가

사람들 속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누구보다 향기롭다.

누구보다 오래, 멀리.


그렇게 나에게 여운을 남겼다.


그 사람은

자신만의 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강렬한 향보다 은은한 향이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그 향은 자신만의 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렬하진 않지만 여운을 남기는 사람.


바로 잔향을 지닌 사람.







너무 짙은 향을 지닌 향수는 좋지 않다.

그 강렬한 향은 사람을 한 번에 매혹시키지만 곧 후각을 마비시켜 아무 향도 맡을 수 없게 한다.


좋은 향수는 잔향이 남는 향수다.

은은한 향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강렬한 향보다 오래가고 기분 좋게 만드는.


잔향.

여운.

그 오랜 기억.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여운을 줄 나만의 향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동.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


이 모든 것들이 적절히 섞인 나만의 향.


나만의 향이 은은하게 퍼질 수 있도록.

나만의 향이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오래도록 은은하게.

여운을 주는.

계속 생각이 나는.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어른이 되면서 자신만의 향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은 거짓된 모습은 언젠가 들키고 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남는다.

빨리 잊혀진다.







오늘부터.

나의 향을 바꿀 것이다.


나만의 진정한 모습으로.

나만의 진정한 향으로.


당신에게 여운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당신에게 오래 기억될 사람이고 싶다.


잔향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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