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된 사랑의 조건
To. 나의 옛 연인
당신과 만나던.
그 시절 단 한 번도 써주지 못했던.
그래서 당신이 몹시도 서운해하던.
그 편지를 이제야 써봅니다.
이건 감사의 편지입니다.
당신에게 처음으로 전하는 진심입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미쁘게.
24살.
첫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그때부터였습니다.
제가 '외롭다'라는 그 낯선 단어를
선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어두운 골목 속 냄새나고 낡아빠진
타지의 잿빛 방 한 칸에서 '독립'이라는
꿉꿉한 단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잘못 든 길이라는 걸 깨달았는데도
벗어날 용기조차 낼 수 없어
이불속에서 끙끙 소리 죽여 울던
나 자신이 너무 밉던
그 외롭던 무렵.
제 앞에 나타난 당신이었습니다.
저와는 상반되는
그런 당신이었습니다.
좋은 학력.
풍족한 형편.
안정된 미래.
크고 튼튼한 몸.
자신감 넘치는 성격.
그렇게 저와는 너무도 다른 당신 곁에서.
어쩌면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어쩌면 나 자신을 잊고 싶었는지도.
그래서 이기적인 저는 외로운 타지에서
하루라도 더 버티기 위한 목적으로 당신과의
'연애'를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수했던 당신은
외롭던 제 일상에 웃으며 들어왔습니다.
그런 당신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을 만나면 만날수록.
저는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한동안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 믿었었지만 곧
그건 저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걸 제 몸이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제 몸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항상 연인에게 의심이 많은 제가,
당신의 이성친구에게 질투심을 느껴본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고.
연인과 흔하게 하는 스킨십도,
당신이 제 손을 잡아줄 때면
이상하게 계속 내빼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매일 사랑한다 말해주고
저에게도 그 답을 원할 때면,
엉뚱하게도 미안하다는 말만 나왔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예쁜 꽃다발을 줄 때면,
왜 그리 꽃이 안 예뻐 보이는지
그 예쁜 꽃을 받아도 웃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저를 몹시도 서운해했습니다.
그때, 저는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 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영혼 없이. 감정 없이. 사랑 없이.
그저 외로움을 잊고 타지에서 버티기 위해
쉽게 사람을 만나는 이들을 가장 증오하던 제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연애인데
당신을 만날수록 죄책감만 들고
슬퍼지고 미안해지기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가 당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제가 당신에게 솔직하지 못할 정도로
나 자신을 싫어했기 때문에.
때문에 이런 거짓된 내 모습을 사랑하는 당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의 끝이 보였기에.
그래서
해맑게 웃고 있던 당신에게
모질게 이별을 말했습니다.
더 이상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더 이상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서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서
갑작스러운 이별통보에
당신은 몹시도 힘들어하며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 했지만.
당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젠 이해해주세요.
죄송하게도 저는 당신과 헤어진 것이
정말 바른 일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과의 헤어짐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조건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줘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외롭지 않은 상태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떤 나의 치부까지도
상대방에게 당당히 밝힐 수 있고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는 나에 대한 믿음
그런 마음가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며 감사하다는 말을 올리고.
처음으로 당신에게 거짓이 아닌 진심을 전합니다.
이 지나치게 솔직한 편지를 읽으며
서운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겠지만
저는 단지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
앞으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진실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이 서운한 편지를 읽으면서도
당신의 감정보다 제 감정을
더 걱정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이런 우울하고 감정 없고 이기적이던
저의 모습까지도 한없이 큰 배려심으로
품어주고 사랑해준 당신은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그런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걸맞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당신 앞에 곧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사랑받는 연애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진심이 담긴 연애편지를 받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으며
오래도록 사랑 주며
행복할 거예요.
그렇게
잘 지내야 해요.
고마웠어요.
정말.
P.S.)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에게.
제 진실된 모습 그 자체로 사랑받고
제 진실된 모습 그 자체로 사랑주는
그런 연애를 하게 될 것이라 믿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이젠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점점 커져가는 걸 느끼거든요.
제가 몹시도 동경했던
당신의 그 모습처럼요.
2016. 10. 24.
From. 당신의 옛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