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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산 Feb 19. 2020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KF94 말고도


날씨가 흐렸던 어느 오후, 다이소로 베이킹 소다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무거운 발걸음의 직장인 무리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주변 소음을 차단한 에어팟에서는 백예린의 square(2017)가 이제 막 시작하는 중이었다.(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지만 특히 그 시작이 참 좋다) 바쁜 사람들 틈에서 여유롭게 베이킹 소다를 사러 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우쭐해졌고, 그 기분으로 나는 살짝 리듬을 타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내가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잘하지도 못하지만 내 노래에 대한 오프라인 관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 와중에 온라인 관심은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다) 

*온라인 관심 https://youtu.be/i7QSaj0NF5s

이토록 오프라인 내향인인 내가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마스크 때문이었다. KF94 마스크가 내 얼굴의 반 이상을, 특히 노래를 부를 때 가장 많이 움직이는 입을 가려주고 있으니 내가 랩을 하던, 노래를 부르던 음량이 과하지 않는 한 누가 알쏘냐? 누가 쳐다본다 해도 마스크에 숨어 나는 아닌 척 시치미 떼면 그만 아닌가?


요즘 많은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마스크는 질병관리, 보건, 예방 등을 위한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마스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차단을 가능케하고 더 나아가 위장도 할 수 있게 한다. 그 날 오후, 마스크는 나의 코와 입을 다른 사람들부터 차단시켰고 나를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위장시켰다.


거의 매일 마스크를 하고 다니면서 아무도 모르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새롭게 느낀 것 중 하나는 눈, 코, 입 근육의 움직임, 즉 표정의 중요성이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의 표정과 제스처에서 순간의 감정과 기분을 파악한다. 일부러 그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러고 있다. 그렇게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눈, 코, 입으로 추측하고 예상하며 그에 맞게 답변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하얀 부직포가 코와 입을 가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눈만 보면서 대화를 해야 한다. 눈과 눈썹, 이마만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기 참 어렵다. 눈은 웃고 있지만 코와 입은 뾰루퉁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상대방의 얼굴을 읽지 못하고 있으니 상대방도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할 것이다. 표정으로 내 감정을 전하고 싶은데 마스크가 차단시킨다. 미세먼지도, 바이러스도, 표정도 모두 잘 막아준다.


마스크를 쓴 표정, 즉 무표정으로 다른 무표정들을 보고 있으면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어두운 미래의 모습이 떠오른다. 희노애락은 마스크 뒤에 숨겨야만 하는...


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믿지 않지만, 인간 사회의 아름다움과 끔찍함은 믿는다. 하얀 부직포로 만들어진 작은 마스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한번 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마스크쓰고노래부르다가의식의흐름대로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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