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삼시세끼 전쟁
겨울방학은 아이들에겐 즐거운 해방의 시간이지만,
엄마인 나에게는 '삼시 세 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는다!
오히려 방학이야말로 내 '집밥 진심'을 불태울 절호의 기회다.
우리 집 냉장고 문에는 그 어떤 유명 셰프의 레시피보다도 중요한 '주간 식단표'가 빼곡하게 붙어있다.
보통은 냉장고나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로 주말에 그다음 주 식단을 짜는 편이다.
아침은 빵이나 간단식. 점심은 한식, 저녁은 중식이나 양식.
아이들이 한식, 양식, 중식, 일식 가리지 않고 너무 잘 먹는 덕분에 나의 요리 스펙트럼도 나날이 넓어지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하루에 1번은 꼭 식판에 밥을 주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알록달록한 반찬들이 칸칸이 담긴 식판을 보면, 아이들은 "우와! 엄마표 급식이다!"라며 탄성을 지른다.
요즘 최애 반찬은 궁채 나물이다. 고소하게 무쳐낸 궁채 나물은 아이들 식판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1순위 메뉴다.
학교에서도 안 먹는 나물을 집에서는 싹 비우는 아이들을 보면, ’ 이 맛에 엄마가 요리하지!' 하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우리 집 초등학생 두 명은 정말이지 '프로 먹방러'들이다.
점심 식판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화 주제는 오직 하나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 해줄 거야? 아까 식단표 보니 콩나물 비빔밥인데,
불고기 넣어주는 비빔밥이야? 아니면 나물만 있는 비빔밥이야?" (11살 언니)
"나는 오늘 왠지... 우동이 당기는데 엄마, 내일 저녁 바꿔줄 수 있어? ”(10살 동생)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터진다.
나의 완벽한 식단표를 이리저리 수정해 달라는 아이들의 끊임없는 요청은, 내가 짜놓은 계획이 조금은 틀어져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귀여운 신호다.
오늘 저녁, 그 견고한 설계도가 무참히(?) 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바로 예고 없이 쏟아진 '함박눈'이었다
식단표대로라면 오늘 저녁은 크림 파스타와 스테이크였다.
학원을 다녀온 첫째가 집에 오자마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던 그때, 아이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소리를 질렀다.
"엄마! 눈이 엄청 많이 와! 꼭 솜사탕 같아!"
창밖에는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송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의 '극 J' 회로가 멈췄다. 이런 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원래의 나였다면 "안 돼, 오늘 메뉴는 “파스타야”라고 단호하게 말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나조차도 그 '낭만'에 항복하고 싶어졌다.
결국 나는 식단표를 잠시 접어두고 냄비에 물을 올렸다.
파스타 대신 라면, 그리고 밥이 없으면 서운하니 급하게 단짠단짠 한 유부초밥을 조물조물 만들었다.
"우와! 식단표에는 없던 메뉴다! 엄마 최고!"
양은냄비에 가득 끓인 라면과 접시에 투박하게 쌓인 유부초밥이 식탁 위에 올랐다.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후루룩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식단표를 완벽히 지켰을 때보다 더 큰 행복이 서려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계획이 어긋났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때로는 날씨가, 때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내 완벽한 계획보다 훨씬 더 훌륭한 레시피가 된다는 것을.
100점짜리 영양 식단은 아니었지만, 오늘 우리 집 저녁은 '추억'이라는 반찬 덕분에 200점짜리 만찬이 되었다.
24시간 중 단 한 시간, 계획을 놓아버린 그 틈 사이로 함박눈처럼 포근한 행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