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산다는 것
"순간을 살고 있는 거야. 얼마나 많은 생들이 먹기, 싸우기 혹은 떼거리 속에서의 권력 이상의
생이 있다는 최초의 생각을 얻기도 전에, 끝나 버렸는지 알고 있어?"
-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문예 출판사, 1973
아이들과 인문학 수업을 하면서 추천도서를 고르다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지만, 책장에 끼여있는
낡은 책이 자꾸 자신을 뽑아달라고 손짓을 해서 그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책의 모서리 부분은
종이가 닳아서 드문드문 살을 드러내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판된 이 책은 심지어 세로읽기다!
아마 아빠가 판매원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대량으로 산 책 중 하나인지, 아니면 누군가 서점에
가서 직접 고른 책인지. 그도 아니면 누구에게 얻은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더구나 교양과는 거리가 먼, 노름으로 평생 소일 삼아오던 아빠가 문학전집을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둔 건
무얼 말하는 걸까? 그의 깊은 예술성? 아니면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허세? 난 모른다.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에 따르면 본인은 정작 책을 펼쳐 보지도 않으면서 전집을 사놓고 내가 자라 그 책들에
호기심을 가질 때까지 보관 중이었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인데 누렇게 뜬 종이에 , 다행히 한자는 아니다.
최근 '갈매기의 꿈' 결말이 새롭게 완성되어 나온 책이 있다는 소식을 온라인 서점에서 접하긴 했지만,
왠지 부모님의 교양이자 아빠의 유품같아 보물을 손에 쥔 기분이 든다.
1973년 1월 10일 초판발행하여 1976년 9월 25일 중판발행한 책.
이 책이 우리집에 있다는 것은 중학교 때 알았고, 그때는 펼치지는 않고 그냥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다.
내 책상에 이런 책도 끼여 있어, 난 이렇게 교양 있는 사람이야, 자기 도취 아니면 만족이었을까? 아이들과
수업하기 전 내가 먼저 텍스트를 읽고 내용을 자세히 알아야 했기에 정성스레 책장을 펼쳤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나단은 조금 특별한 갈매기다. 지금으로 치면 학교를 박차고 나가 자신의 길은
이것이라며 당당히 선포하고 멘토를 찾아나서는 학생이랄까? 조나단이 만난 스승. 몇 달 전에 읽었는데 벌써
줄거리가 가물거리고 인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다니... 나도 참!
아이들에게도 나누었지만 '나는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고 먹이를 찾아 낮게 날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갈매기들 속에서는 이해받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조나단. 그의 날개짓을 통해 내가 위로받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순간을 사는 것.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엄'. 죽음을 기억하고 그 순간을
즐기라는 여러 가지 표현들도 있지만. 단지 먹이를 위해 서로 다투고 빼앗고 그 외 다른 세계는 있는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무리들을 향해 조나단은 용기 있게 선언하고 과감히 집을 벗어난다.
자신을 향한 뜨거운 눈초리들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친구를, 자신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발견한다. 나는 지금껏 "왜 일해요?"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항상 "먹고 살려구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커녕 하루하루 노름으로 시간을 때우고 수술 이후에도 약을 챙겨먹지 않고 병원에 수차례 들락날락하던
아빠로 인해 내 삶은 한 달을 견디는 것. 날아온 고지서들을 처리하고 이번 달도 무사히 낼 돈을 내고 넘어가는 것. 달마다 이자를 건너뛰지 않고 내는 것. 월세를 충당하는 것. 그런 문제들로 인해 엄마가 있는 집을 떠나
여행을 간다던지, 어디에 돈을 내고 자격증을 딴다든지 하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배짱과 용기도 없었거니와 혼수 자금은 커녕 바윗돌처럼 어깨에 얹어진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고 좀 당당
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목표 아닌 목표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마음에 두었던 이도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그냥 쉽게 보내버리고 결혼도 꿈도 무엇도 없는 먹지 상태로 살아감이 때로는 두렵고 나이듦이 무서웠다.
인생이 쓰디쓴 에스프레소 같았다.
그런 내게, 찻값조차 아껴야 하고 차비조차 아껴야 하는 내게 조나단은 활짝 편 날개로 비상하라고, 이제
그만 자신을 가둬둔 그 창살에서 빠져나오라고. 해보라고, 날아보라고 자꾸만 재촉했다. 아니, 보여주었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이 끝나버리기 전에 나도 너처럼 훨훨 날아서 큰 세상을 맛보고 싶어. 네가 보여줬듯이, 높이 나는 걸 수없이 연습하고 회전하고 각도를 틀어가며 고꾸라지고
차다운 바다에 빠지면서 나아졌듯이 나도 그렇게 먹는 문제에서만 맴돌게 아니라 스스로를 얽어맨 자아의
감옥에서 탈출하고 말겠어. 그 생각만으로도 자유로워.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그냥 눈 뜨고 먹고 돈 벌어 각종 세금과 내야 할 돈을 내고 평생을 살아간다면 참 재미가 없을 거야.
나도 조금씩 조금씩 날개를 움직이고 때로는 내가 선 이 곳에서 조금 멀리 날아가고. 돈이 없어 못 한다고
생각했던, 그렇게 포기했던 수많은 일들 중에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며
내가 소망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향해 나아가기로 할게. 그렇게 해볼게. 용기가 나고 마음이 시원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런 존재이다. 분명 한계가 있고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조건들로 힘겨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시도조차 안 할 건 뭐람. 먹고 사는 문제 이외의 또다른 생이 있다고
온 몸으로 가르쳐주는 조나단 시걸. 이 책의 저자 또한 자신의 책이 나중에 베스트셀러가 되리라는 것을
모른 채 처음에는 이상한 책이라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니.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것이다.
순간을 사는 것! 그래서 당신과 나, 우리는 지금 현실을 보고 낙심만 할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할 순간을 끊임없이 꿈꾸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화려한 날개짓으로 하늘을 나는
자신과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