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 또 있구나!

실패도 되풀이되면 맷집이 생기는 법

by 윤작가

완주하지 못해도 일단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면 기념품을 받고 부족한 부분도 알게 되니

마냥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그 과정 중에

얻게 된 무언가도 나름의 성취로 받아들이는 쪽이 나는 더 좋다. 패배주의라면 패배주의겠지만

철인 3종 경기는 원래 힘든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철인 3종 경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 따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런 세상에선 패배주의도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만화가로 사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상상 못한 고통과 슬픔들이 잔뜩 쌓여 있는

세상일지 모른다. 상관없다. 그 과정 중에도 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흘러왔듯 또 어딘가로 흘러가겠지.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에세이, 문학동네, 2017


그는 현재 잘 나가고 나는 정말 보통 사람. 그는 대기업 회사원이었으므로 퇴직금을 받았고 나는 프리랜서이므로 비상금이 없다. 그는 트위터를 향해 세상과 의도치 않은 소통을 하게 되고 나는 브런치를 통해 몇몇 작가님과 댓글로 교류하는 중이다. 그는 나보다 더 용기있고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이고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으나 그의 이야기에 동조되어 위안을 받고 지금 여기에 글을 적는 중이다.


그는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라는 정말 다행스럽고 포근한 제목의 에세이를 낸 김보통 만화가이다. 죄송하게도 이 멋진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아니다! 도서관에 당당히 희망 도서로 신청하여 강물처럼 흘러가는 위로와 차가운 바닥 위로 포근히 비치는 햇살같은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가난한 집안, 아버지의 권유로 대기업에 들어간 김보통 작가는 4년 만에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도저히 견디지 못 하고, 버티지 못 하고, 술을 먹는 행위보다 술을 먹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서, 자신의 존엄이 점점 낮아지고 희미해져서 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회사에서 자진 탈출한다. 솔직히 이 책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페북은 커녕 트위터도 계정만 만든 후 얼마 뒤에 탈퇴한지라 그동안 김보통 작가의 명성을 알 기회도 없었다. 트위터를 하고 있었다면 분명 사진을 보내며 프로필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브런치에서 알게 된 몇몇 작가님들 중에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에게 공짜로 그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대가를 지불하고 그림을 요청할 처지도 못되기에 구독자로서 그분들의 그림을 엿보고 있는데... 김보통 에세이를 읽으며 그분들도 덩달아 연상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분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될 것 같다는 희망이나 기대감 같은 것이겠지.


어릴 적 그림의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이 김보통 작가에게 수없이 "너는 그림을 그려야 해!"라고 이야기했지만 생활에 묻혀 모른 그냥 살아왔다던 그의 이야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수많은 연습장을 낙서로 도배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밥벌이를 완전히 끊고 디자인 학원에서 6개월 가량 애니메이션 그리기 과정을 수료했을 때가 생각나서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는 불행해지기 싫었다. 주변의 혹평과 오지랖을 뛰어넘은 애정 어린 조언들, 현실을 직시하라던 선배들과 교수님의 충고에도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흘러보내고 있었단다.


그 점이 사뭇 위로가 된다. 가르치는 아이들의 머릿수에 따라 통장에 들어오는 교육비가 달라지고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삶이기에. 자면서도 꿈 속에서도 근심이 떠나지 않았는데 오늘 이 책을 읽으며 걱정거리가 다시 차츰 가라앉기 시작한다.


"큰 그림을 그려야지."라고 쉽게 이야기하던 주변 사람들의 말이 너무 섭섭했다. '어쩌면 저리도 하나만 보고, 하나만 알까?'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다.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주어진 시간, 오늘도 눈을 뜬 이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한 나였기에 자신을 위해 브라우니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던 김보통 씨가 너무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메일을 보내 그림을 부탁하려 했지만 이제는 유명해진 탓인지 그의 메일 주소를 알 수가 없다.


"너는 참 욕심이 없다!"던 엄마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던 여고생은 앳된 나이를 벗어나서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나와 같은 모습인지도 모를 이들이 세상에 한둘이 아니구나 싶어 내심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문집이 나오고 우리 가족은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가 될 모양인 양 오묘한 시선으로 주시하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란 사람은 성취 지향형이 아니므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감흥이 오면 글을 적고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종종 소통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대작가가 되기보다 김보통 작가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하루하루 급하지 않게 노심초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참으로 멋지고 부럽다! 모든 것을 놓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정직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가는 길. 웹툰하고는 담 싸놓고 사는데 처음으로 '한 번 봐볼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보지 않겠지만.


마음에 와닿는 페이지를 몇 장 찍어 그림을 좋아하는 제자에게 톡을 보냈다.


"너무 좋다. 그래서 추천!"


빚을 갚고 돈이 모이면 컴퓨터와 연결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태블릿을 하나 사거나 끄적거리는 시간을 가져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핑크빛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아직, 불행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빚을 다 갚고 비상금까지 두둑하면 행복지수가 큰 폭으로 올라가겠지만. "그래요,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아직, 불행하지 않아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다.


마음 속에 꺼진 줄만, 아니 냉정하게 꺼뜨린 줄로만 알았던 그림에 대한 불씨가 아직도 재 마냥 남아있어 반갑고 사랑스러운 예명을 가진 작가의 앞날도 환하게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단지 '행복'이란 이름에 얽매이지 말고, '아직, 불행하지 않!'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이길 슬며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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