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터널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사람이 싫어질 때,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에도

by 윤작가

주근깨 때문인지 어릴 때 종종 빨간머리 앤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러면 어떠랴,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당시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뭐 썩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렇게 예쁘지 않고 불우한 환경에 있는 앤에 비유될 게 뭐람. 하지만 지금은 과분한 애칭이라 생각한다.

어릴 적 살던 사택은 앤이 살던 집처럼 벚꽃나무로 둘러싸인 마당 넓은 집이었다. 봄마다 환한 꽃비가 내리던 숲속같은 거리. 봄마다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는 꼭 사진을 찍어주셨지. 힘들게 살아도 할 건 다 하고 살았구나. 지금은 흐릿한 과거로 지나갔지만 아리고 숨 막히던 순간들이 벚꽃으로 흐려져 지금껏 숨 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문단이다.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다.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동생은 지금 자기 머리카락 주울 기운도 없다. 그래서 청소며 조카들 챙기는 일은 내 몫이다. 7시가 되기 전부터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종종거리지 않은 순간이 없다. 낮잠을 잘 겨를도 없다. 주말이라고 편하지 않다. 일하고 조카들 돌보고 일상은 쉼없이 돌아가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작년부터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부터 모든 것이 생각지도 못한 일의 연속이 아닐까? 이런 가정에 태어날 줄은, 이런 아빠를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아빠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이런 엄마를 만난 것은 최대의 행운이다. 그런 면에서는 앤과 비슷하다.

모두가 잠든 이 밤 나는 아직 세수도 못했다. 양치질도 못했다. 일하고 돌아와서 조카들과 떡볶이를 먹었다. 엄마가 삶아놓은 계란을 하나 까서 같이 먹었다. 그러고 이래저래 있으니 동생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보기도 애처롭다. 눈빛이 멍하고 너무 지쳐 서 있기도 위태로워 보인다.

나쁜 그놈 때문에 왜 내 동생이 이런 일까지 하며 힘들게 살아야 되는가, 또 이 생각이 올라온다. 어쩔 수 없다. 그놈이 우주로 날아갔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알맞은 때에 이루어지든지 해야지 지금은 소송 중이다.


조카가 사랑스럽고 동생이 애처롭지만 내 신세도 처량하다. 이게 뭐람. 화창난 봄날, 도시락 들고 소풍이라도 가면 좋을 날씨에 나는 뭐 하고 있지? 산다고 동동거린다. 지겹다. 언제까지? 이 수고가 끝이 날까?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는 인생에 대해 조금 알겠다. 터널은 끝이 없다는 것. 이것만 해결되면, 이것만 지나가면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오늘 무사히 지나가도 내일 무슨 일이 터질 지 모른다는 것. 앤을 통해 몽고메리 여사는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왕 사는 거, 터널은 언제든지 올 수 있어요. 그냥 살아요.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모든 게 잘못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멋진 일이 펼쳐질지 누가 아나요?"

그래 그 말을 믿고 싶다. 잘 되지 않겠지만. 이제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산다. 주어진 대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아이들을 챙기고 동생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늙어가는 엄마가 서글프고 내 인생도 불쌍하다. 그래도 이런 생각은 혼자 있을 때 드는 것이고 때마다 해야할 일을 하노라면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내일은 생각지도 못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영혼을 끌어올려 기대감을 안고 자야겠다. 씻으러 가기도 피곤하다. 그래도 할 건 또 해야 한다. 아이고, 인생아! 자, 다시 한번 더 꿈을 품어보자! 손목은 시큰거리고 날갯죽지는 뻐근해도 이제 터널이 몇 개나 남았든 상관없이 다 지나쳐 주리라. 어둠도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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