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는 누가 위해주지?"라는 생각이 들 때 하는 일들
"남에게 장미를 주면 내 손에 향기가 남는다."라고 카네기는 말했다지만, 그 달콤한 향기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엄마와 동생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각자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글쓰기에 들어간 시간과 수고가 동생의 이혼 진술서와 소장에 대한 답변서를 쓰는데 도움이 될 줄이야.
오, 이런! 그래, 그러면 어떠랴. 학교에서 돌아온 조카들을 맞이하고 간식을 챙겨준다.
"이모, 나 핫도그 데워주면 안 돼?"
귀여운 조카의 말에 전자렌지에서 핫도그 하나를 1분간 데운다.
"케첩은 원하는 대로 뿌려."
케첩뿐만이 아니라 마요네즈까지 살짝 얹어 먹는 둘째 조카는 식성이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스타일'. 그래서 고기를 좋아하고 씹는 것보다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음식을 좋아한다. 학교가 끝나면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 식품류를 산다.
오전 학교에 가기 전,
"학교 끝나고 사 먹으려고 했는데, 잔돈이 없네."
라고 조카가 말했다.
"그럼, 이모가 돈 빌려 줄 테니까 나중에 뭔가 해서 갚아."
이야기를 들은 조카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 치약처럼 쭈욱 짜서 먹는 초콜릿을 손에 들고 왔다. 그러고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 할머니 안마해드리면 되지? 그럼 오백 원 없어지지?"
"그래, 그러면 돼!"
애틋하고 귀여운 조카들이고 아기 때부터 우리 집에서 동생이 몸조리를 해서 엄마와 내가 같이 양육해서 정이 듬뿍 든 아이들이다. 아기 때 웃던 모습, 짓던 표정들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도 몸은 힘들다. 오늘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점심을 먹은 뒤 잠깐 눈을 부쳤다. 20분 정도 알람을 설정하고 전기장판을 켜고 잤다. 입을 벌리고 잘 정도로 피곤했는지 알람 소리에 깬 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이제 혼자서 쉴 수 있는 날은 없는 거겠지. 예전에는 금요일이나 토요일 조카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일요일 돌아가면 평일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생겼는데... 이제는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시로 잠기는 눈을 부릅뜨고 수업 자료를 준비한다. 시험 기간이라 찾을 작품이 많다. 문제도 뽑아야 하고, 작품 해설도 저장시켜야 한다. 이래저래 피곤한 4월. 돈이 많이 없어 큰 목록으로 쇼핑을 하지 못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인터넷을 뒤져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물품을 고르려니 눈이 아프다. 머리가 띵하고. 그렇지만 짜증이 날 정도로 피곤해지면 소액으로 쇼핑을 한다. 예를 들어, 책에 붙일 인덱스 플래그를 고르거나 소소한 학용품들을 눈여겨본다. 장바구니에 잠고 '나중에 결제하기'로 설정했다가 입금시켜야 할 날짜를 넘겨 주문이 취소되기도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다시 쇼핑을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결제를 한다.
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물품이 도착하기까지의 기대감과 설렘이 좋으니까. 그런데 막상 택배 상자를 열면 순간적으로 기쁠 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풀이된다. 그래도 이런 사소한 것으로라도 내 마음을 달래어 주고 싶다. 조카들은 다행히-겉으로 봐서는-학교에 잘 다니고 밥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만들어준 계란찜에 환호성을 터뜨리며 '맛있다'를 연발한다. 고맙다. 요리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게 처음이라. 아무튼 조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군대를 가고 직장을 다니고 누군가와 결혼할 때까지. 자신들의 가정을 이루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또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울타리 속에 너희는 무럭무럭 자라면 되는데, 그럼 나는 누가 위해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스스로 보상을 해주자. 그래서 필름 인덱스 하나와 지우개 두 개, 지우개 달린 연필 세 자루, 샤프펜슬 하나를 시켰다. 그중에 지우개 하나, 연필 두 자루는 조카 주려고 샀지만, 나머지는 내가 내게 주는 육아 보상이다.
책을 펼쳤는데, 이런 문장이 있다.
"죽을 때까지 길을 양보해도 백 걸음을 더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밭두둑을 사양해도 한 뙈기밭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소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문장을 보니 나의 지평이 아직 좁구나 느끼게 된다. 나 자신을 위해 보상을 한다고 쇼핑을 하는 것이 너무 좁고 자잘한 방안 같아서. 큰 생각을 가지고 길게 보지 못했구나, 당장의 힘듦에 굴복하고 말았구나 이런 생각이 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하면 기분이 좋다. 몇백만 원하는 명품 가방도 아니고 주식에 큰돈을 넣는 것도 아니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주문하고 입금하지 않아 취소된 뒤 또 고민해서 결정한, 대략 만 원의 행복을 누리면 좀 어때서? 이런 생각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다독이고 격려하고 사랑해주면 그것 또한 짜증을 다스리는 작은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깝다. 해야 할 일들이 멈추지 않고 마구 다가오는 것 같다.
예쁜 도시락 싸서 소풍 가기에 좋을 만큼 화창한 날이건만 나는 방구석에서 컴퓨터와 씨름하며 생계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한다. 피곤한 인생이여! 고달프지만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이여! 주문한 샤프펜슬이 제발 마음에 꼭 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