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상에 충실하기

가벼운 짐이 아닌 튼튼한 허리를 위해

by 윤작가

"I do not pray for a lighter load, but for a stronger back."

(나는 더 가벼운 짐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튼튼한 허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 필립스 브룩스


결국 약을 먹는다. 우리가 단호히, 간절하게 말려도 말을 듣지 않더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모양이다. 일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원래 예상했던 것과 다른 일을 시킨다고 말한다. 화초를 돌보러 들어갔는데, 풀뽑기도 아닌 벽돌 나르기를 하고 있단다.

"그건 여자들이 할 일이 못 된다."

작업장을 옮기면 옮겼지, 왜 연약한 여자들에게 원래 주어진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시키는지. 발톱이 상하고 엄지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고통스러운지 제발로 찾아가서 약을 타왔다.

"일 하다 몸 부서지겠다, 그만둬라!"

언니가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내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애들 엄마니까, 우리에게 미안하니까 힘들어도 꾹 참고 묵묵히 다니는 모양인데. 너무 안쓰럽다.

프리랜서인 큰애는 조카들을 제 자식-제 자식도 없지만-같이 돌보아 준다. 이른 아침 일어나 조카들이 줌 수업을 잘 할 수 있도록 노트북과 교과서, 알림장을 살피고 그날 해야할 일들을 헤아린다. 막일을 하는 동생을 대신해서 엄마 노릇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큰애는 교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손녀를 데리고 안과에 가서 시력 측정을 하고 안경점에 들러 안경을 맞춰주고 왔다. 본인 안경은 맞춘 지가 5년도 넘어가는데, 조카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성격이 급해서 버럭 하지만 이럴 때는 찬찬하다. 이제는 둘이 싸우지도 않는다. 저번에 심하게 다툰 뒤로 큰애가 잔소리를 줄이고 있다.

"잔소리 한다고 달라지면 하지. 그냥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 이래라, 저래라 예전처럼 간섭하지 않고 작은 애가 퇴근하면 밥 챙겨주고 손은 괜찮은지 물어보는 정도다.


어디서 옮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저 문장을 오늘 다시 발견했다. 평소 책을 보거나 좋은 글귀가 있으면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무심코 들여다 본 메모장에 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좀 더 짐이 가벼워졌으면 했다. 지긋지긋했던 지난 시절을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힘들었던 결혼 생활. 내 집 가지고 한번 제대로 살아볼까 싶은 찰나, 둘째를 결혼시키고 이가 우두둑 빠지는 바람에 임플란트 비용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큰 애가 다달이 대출금 갚기도 버겁고 더 이상 빚 지고 살기 싫다며 집을 팔자고 해서 빌라를 처분했다. 여기저기 빌린 돈을 갚고 나자 월셋방 보증금 얻을 몇백이 겨우 남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작은 애한테 큰일이 터져 버렸다. 생전 아빠 때문에 짐 지기 싫다고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겠다던 큰애는 다시 짐이 커져버렸다.

많이 힘들텐데... 많이 피곤할 텐데....... 계속 움직인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기도의 내용을 바꿔야겠다.

짐이 작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더 강하고 튼튼한 허리를 위해 기도하자.'

우리에게 어떤 짐이 오더라도 거뜬히 질 수 있는 강한 등!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해본다.


우리는 이렇게 일상을 지내고 있다.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비가 오면 불평하는 대신 우산을 드는 수고를 할 것이고, 우산이 없으면 어느 처마 밑으로 급히 피해 세찬 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바람이 불면 옷깃을 더 여며 체온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고 햇볕이 강한 날은 손으로 이마를 가려 최대한 서늘한 그늘을 만들며 살 것이다. 가만히 서서 감이 떨어지게 기다리고만 있지 않겠다. 하루 하루, 나날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을 충실히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가벼운 짐이 아닌 튼튼한 허리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집안일로, 여러 가지 살펴야 하는 일들로 손주들과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하고 각자 폰을 잡고 게임이나 유튜브를 보게 해서 미안하고 마음이 쓰리다. 밥만 먹인다고 잘 키우는 게 아닌 것을.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챙김 받아 마땅한 아이들인데. 아빠의 부재와 손실에 대해 어떻게 보상해줘야 할지, 채워가며 키워야 할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 곁에서 직접 지은 밥을 먹일 수 있어 감사하기도 하다.

"여기 오니 이런 게 좋아. 혼나지 않으니까. 아빠는 많이 혼냈는데..."

아까 떡볶이와 삶은 계란을 먹던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뭘로 많이 혼냈어?"

"이렇게 내가 뭘 흘리거나 하면 막 혼냈어.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런데 아빠가 그러면 '이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야."

뻔히 보인다, 그 광경이. 말해 뭣 하겠는가. 자신에게만 유리한 발언을 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이 입에 달렸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또 속상해진다. 그놈은 제 자식도 눈치보게 만들었구나 싶어 성이 난다. 나쁜 놈! 두고 봐라, 우리 곁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숨을 쉬는지. 너 같은 인간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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