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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을 쓰다

가을 따라 노란빛 물결

쌓이고 쌓이면 뭐라도 된다!

by 윤작가

애는 많이 쓰여도 실효성 없는 방법

현관 앞에 놓인 레몬

무엇이 문제일까? 분명 인터넷 검색해서 알아낸 정보였다.

1. 굵은소금으로 박박 문지른다.

2. 살짝 데친다.

3. 식초와 물을 1:3으로 씻는다

4. 손을 넣을 수 있는 온도로 설정한 온수에 10초 둔다.

다 했다. 그런데 씻으면 씻을수록 하얗게 일어나는 불상사.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지만, 청량한 노란빛 아닌 하얗게 뜬 모습이 보기 싫어 식용으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



단번에 해결하다

식용 왁스 하얗게 뜬 천연 방향제 친구여!

설명 들은 어머니와 동생은 온수에 레몬을 담갔다는 말에 기막힌 듯. 어머니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텐데, 뭐 하러 그리 했냐며 한심해하셨고, 동생은 큰 소리로 웃었다. 미끌거리는 식용 왁스가 온수에서 냉수로 옮겨지며 굳은 탓인지, 노란빛은 점차 주황빛으로 변해간다. 화학 성분에 민감한 사람이라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거라는 결론 내리고, 천연 방향제로 결정!

사실 이 과일은 위층 주인아저씨가 회사에서 수입 과일 검수하고 버리기 아깝다며 집에 들고 온 것이다. 주신 성의는 고마우나, 처음부터 상태가 안 좋았다. 약간 멍든 것처럼 치이고 아파 보이는 아이들. 물 건너온 애들이라 상표 그대로 붙여 하나는 내 방에 방향제로 놓아뒀다.




그녀의 손가락

온통 노란 물결 속 빨간 뚜껑 하나!

기존에 산 은반지에 지인이 줬던 10k 금반지 겹쳐 낀 어머니는 이제야 겨우 진정된 오른손-얼마 전 차량 트렁크 사고로 부상-으로 열심히 레몬을 썬다.

양끝 꼭지 떼라는 동생의 잔소리에 "내가 그것도 모르냐?"라고 한 마디 남긴 후, 자신만의 창조적 작업에 들어간 그녀.

자궁근종으로 감귤류를 못 먹는 내가 지인에게 부탁해 택배로 받은 서울 한의원 포도당을 기꺼이 양보했다, 레몬청에게.

사진 찍고 보니, 레몬도, 바구니도 온통 노란빛이다. 집안에 가을이 가득하다. 학원생 줄어 수입도 바닥인데, 오늘 아침 예전에 과외했던 학부모님 전화. 기말고사 전, 8주 동안 시험 대비해 달라는 부탁이다. 역시 아는 사람이 찾아주는구나 싶어 웃었다. 한 푼이 아쉬운 판에 생활비 벌어 감사한 아침이다.


그대로, 그 나름대로

"그대로, 그 나름대로"는 박상은 작가의 독립출판물 제목이다. 며칠 전에 산 책이다. 요즘 방구석 그림쟁이로 수채화를 그리면서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저자는 그리고 난 후, 붓자국이 가득한 휴지를 찍어 그림과 엮어 독립출판물로 간행했다. 색감이 번지는 자체가 멋스럽고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우리는 추구하는 것들에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흔적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며 때로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의외로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그 발자국들이 하나둘씩 모여 중요한 결정으로 향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안내합니다."

- 박상은, <<그대로, 그 나름대로>> 중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무가치해 보여도 언젠가는 쌓이고 쌓여 하나의 가치를 만들 거라는 믿음이 강해지는 요즘, 재미로 그린 그림을 놀이 삼아 '아이러브아트' 앱에 판매용으로 올렸다. 판매 여부와 나의 실력은 당장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계속 움직이는 순간의 행위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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