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노 Feb 10. 2022

직업인의 살림

나의 고단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환하게 웃어주며 입술을 내밀어 줘야겠다

 야근이 잦았던 직장인이었다. 출장도 많았던 직장인이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가장 힘든 건 아내였다. 도움받을 친척 하나 없는 차가운 도시에서 홀로 맞닥뜨린 집안일과 육아의 굴레, 그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을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애틋하다. 늦은 시간에 일을 마친 후 입술을 내밀며 현관문을 열어주던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왜 그 고단함을 전혀 알지 못했던 걸까? 뭐 당연한 거 아닌가. 해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살아가게 된 지 1년 6개월이 흘렀다. 양평의 시골 한 구석에서 직업인이 된 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징그럽게 추운 날, 징그러운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아도 되었고 회사에서의 일을 생각하느라 몸은 집에 마음은 회사에 있는 기괴한 판타지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내는 양평군의 보건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8시 30분에 출근하여 5시 30분에 퇴근한다. 무슨 일을 하던 똑 부러지게 잘하는 아내가 전공 관련 일을 시작하니 눈에서 자신감과 생기가 넘친다. 이곳 또한 직장이기에 생기를 매 말리는 건조함이 깊숙이 퍼져있는 것은 물론이다. 아내도 직장인이었을 때의 나처럼 그 기괴함을 경험하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는 출근하고 올해로 5학년이 된 결군과의 일과가 시작된다. 결군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다. 이번 겨울방학은 무려 58일이며 오늘이 바로 35일째 되는 날이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야심 차게 장만했던 마샬 스피커를 켜면 "두둥" 소리와 함께 내 전화기와 블루투스 연결이 된다. 음악이 흐르는 정남향의 빛이 잘 드는 거실에 앉아 있으면 분위기 좋은 카페 그 이상이다. 아침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바로 다이슨 누님을 소환한다. 하얀 마모륨 장판은 부쩍 많이 빠지고 있는 머리카락들을 더욱더 눈에 띄게 한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걸레질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접는다. 


 침대 이불을 정리하고 옷방으로 가보니 빨래 상자가 가득 차서 결군의 내복 바지 다리 한쪽을 게워내고 있다. 끝없이 나오는 소금 맷돌처럼 우리 집 빨래통은 매일매일 빨래가 가득하다. 세탁기에 빨래를 털어 넣고 세재 넣고 세탁기의 시작버튼을 누르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이케아 안락의자에 앉아 결군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멍한 상태로 프랭크 허버트의 '듄' 1권을 집어 든다. 몇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도서관 코딩 줌 수업 시간이 코 앞이다. 월, 화, 수 만 일하고 오전 시간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주3일 오후 근로자이며 방학 때면 엄마들에게 잠시나마 숨 돌릴 시간을 선물하는 오전의 도서관 수호천사이기도 하다. 결군과 같은 세계관을 가진 초딩들에게 파묻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업이 끝나버린다. 정신연령이 어린 탓에 초딩들과의 수업은 언제나 재밌다.



 수업이 끝나면 여지없이 점심시간이다. 점심밥은 1시간 안에 차리고 먹어야 한다. 바로 다음 타임 도서관 오프라인 수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생각해놓은 오므라이스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주르륵 늘어놓고 기계처럼 부치고 볶으면 15분 만에 분식집 비주얼의 오므라이스 한 접시가 나온다. 결군이 엄지 척을 하며 먹는 동안 나는 얼른 수업에 필요한 노트북을 가방에 찔러 넣는다. 설거지를 하고 물이 튄 싱크대 구석구석을 행주로 닦고 난 후 서둘러 집을 나선다. 뭔가 소리없는 전쟁을 치룬 듯 집을 나서지만 돌아오면 집은 변한게 없다. 변한게 없으면 좋은거다. 뭔가 하면 집안은 평소의 모습이지만 뭔가 하지 않으면 평소와 다르게 엉망인 것이 집안살림이다.

 

 아내의 살림을 은연중 과소평가했던 과거의 직장인은 직업인이 되고 나서야 한참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월, 화, 수 주3일 근로자에게 주말과도 같은 목요일이지만, 여태껏 아내가 해왔던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살림꾼들이 해오고 있는 것처럼, 뭔가 한 것 같지 않은 살림을 해내는 날이기도 하다. 


아내가 그래줬던 것처럼, 

나도 퇴근 후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아내에게,

나의 고단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환하게 웃어주며 입술을 쭈욱 내밀어줘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불안하지 않거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