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우리의 일상은 안녕하다
수리산 앞 작은 22평 아파트가 우리의 마지막 집일 것만 같았다. 천문학적(?)인 인테리어 비용에 대한 보상심리와 더불어 집 바로 앞에 자리잡은 수리산과 도서관 이용권만으로 그 이유는 충분할 것만 같았다. 층간소음으로 그 집이 마지막이어야할 이유들이 처참히 짖밟힐 줄은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당시 기억을 돌아보면 내가 보지도 못했던 그 소음유발자의 얼굴은 영화 '곡성'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악마의 모습일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지막집을 버리게 만든 장본인의 모습은 분명 그러해야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소음유발자는 때에 따라서 누구나 될 수 있다. 당시의 분노는 이성적인 생각을 삼켜버렸었다. 얇은 콘크리트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소리를 감추기에는 물리적으로 역부족이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파트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층간소음을 어느정도는 품고 살아야 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집을 팔고 집을 짓기로 했다. 좋을때는 밝은 곳만 계속 보게되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어두운 곳만 계속 보이게 되는 심리를 우리는 이겨내지 못했다. 물론 집을 짓기로 결정한 이유는 몇가지가 더 있다. 층간소음은 일종의 트리거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집이 빨리 팔렸다. 사다리 차가 낡고 쓸쓸하게 서 있는 857동의 베란다에 턱 하니 사다리를 걸쳐 놓으니 '이거 잘 하는 일인가?' 라는 의문이 불현듯 스쳤지만 애써 모른척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양평의 시골 어귀에서 집을 짓는 동안 근처의 2층 작은 상가 원룸을 구했다. 곧 마흔을 앞둔 직장인,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조금만 더 인정을 받으면,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지금을 내려놓으면, 무언가 기대해 볼 수도 있는 직장인이 퇴사를 하고 연고도 없는 시골에 뭘 하고 살지 계획도 없이 와버렸다. 집을 지으며 받은 대출을 어떻게 상환할지도 무계획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둘러봐도 산만 보이는 이곳에서 어떻게 경제활동을 한단 말인가. 직장 혹은 주변의 지인들이 쏜 "왜?"라는 의문의 화살은 내 삶의 믿음에 날아와 박혔다. 계좌의 잔고처럼 텅빈 마음에 애써 감춘 불안이 채워졌지만 마흔의 앞에서 이 모든 루틴을 깨뜨려야만 마흔 이후의 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의문의 화살을 맞으며 7년을 걸어왔다.
귀촌 후 7년차다. 다행히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편의점이 두 개나 생겼다. 한 10분은 걸어야 하지만 엄청난 편의 인프라가 생긴 것이다!? 몇 년에 걸쳐 편의점 없는 삶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편의점 있는 삶에 익숙해지는 건 한 순간이다. 하교길에 출출한 결군과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함께 사먹는 행복을 선물해 준 편의점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파트와 더불어 모든 집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집은 가꾸며 사는 것이다. 가꾸며 사는 즐거움은 주택에서는 더욱 배가 된다. 우리 집의 내부 인테리어는 대부분 목재이다. 목조로 지어진 주택에 목조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주를 이룬다. 원목은 시간이 흐를수록 원숙미가 느껴져서 좋기도 하지만 다시 자르고 다듬어서 다른 가구로 변신시킬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다.
우리 집을 설계하고 내부 목조 인테리어의 9할을 담당했던 아내는 7년차 주택살이에 들어서자 인테리어에 조금씩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인테리어가 주는 삶의 윤택함을 아내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제일 먼저 8년차에 접어든 결군의 원목 평상 침대를 분해하기로 했다. 우리집에서 원목은 함부로 버려지는 일이 없다. 결군의 침대는 9만9천원짜리 리퍼 원목침대로 대체하고 분해한 평상의 나무로 식탁 옆 책장을 제작했다. 아내는 침대를 분해하고 자르고 샌딩하고 구멍뚫고 스테인바르고 조립하는데 무려 8시간동안 쉬지도 않고 작업을 했다. 원래 대단한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덕분에 책을 좋아하는 결군이 빌려온 30-40여권의 도서관책들이 뒹굴던 식탁위에는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마흔의 문턱에서 귀촌한 나는 이제 마흔 다섯살이 되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임펄스처럼 가파르게 상승하는 두려움을 안겨주었었다. 같은 직장인이면서 자신이 살기위해 두려움을 역이용하며 다른 직장인을 궁지에 모는 모습들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역이용당한 직장인들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 또한 그랬다. 그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귀촌한 나는 마흔 다섯살이 되었고 지금은 두려움으로 역이용 당하지 않는 직업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20여년동안 개발을 해온 개발자의 역량을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 할애하는 코딩클래스를 운영중이다. 경제적인 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스스로 직장인의 굴레를 벗어나 직업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행복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보니 뜻이 같은 사람들과 모여 작은 사업도 진행하게 되었다. 직장인시절에 꿈만 꾸던 것들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택했던 주택담보대출도 앞으로 두달안에 모두 상환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대출이 없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직장인이 아니고서는 절대 할 수 없을것만 같던 일을 직업인으로서 하게 되다니 꿈만 같다... 정말 꿈만 같다....
귀촌 후 7년 차, 우리의 일상은 안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