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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Aug 28. 2022

이걸 '쏘서'라고 부르는구나

적당히 버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잘 사는 건 어쩌면 쉬운걸지 몰라 


 퇴사를 하고 언제인가 전주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잘 알려진 한옥마을의 구석구석에 발자취를 남기다 들른 곳이 청년몰이었고 그 곳에서 한 문구를 보게 되었다. 



"적당히 벌어 잘 살아보자"



 일과 가정의 균형,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하는가, 그 양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는가? 나는 그 양의 기준을 충족시킬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두리뭉실한 그 기준을 언제까지 좆아가며 살아갈 것인가? 내 삶을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에 무뎌질 수 있을까?  

 적지 않은 질문에 허덕일 때였고 머리 속에 얽힌 실타래 한 뭉치가 들어있는 듯 갑갑했던 즈음이었을거다.



'적당히 벌어 잘 살자'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명료한 한 문장은 나를 흔들어 놓았다.



 '노후생활자금 최소5억' '폐지줍는 노인들' 미디어는 공포를 조장했고 유튜브는 그대로 따라하면 운영자처럼 돈을 벌 수 있을것처럼 희망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중년의 서민을 과노동의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도록 최면을 걸었다. 도대체 그 목표점과 숫자는 누가 정하는 것이란 말인가. 내가 얼마만큼 일해서 얼마만큼 벌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존재가 내가 아닌 타인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적당히' 라는 단어는 그 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적당히 일해', '적당히 벌어', '적당히 살아', 살아가며 흔히 하는 말 속, 그 단어의 양은 말을 건네는 사람에 의해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적당히 번다'는 말 또한 말을 내뱉는 나의 의해 결정되어진 양이다. 더불어 '잘' 이라는 단어도 그 정도가 정해지지 않았다. '잘 자', '잘 살아', 잘 지내', '잘 가' 살며 지내며 얼마나 많이 하는 말들인가. '잘' 이라는 하는 단어의 양은 건네는 사람보다는 받는 사람에 의해 그 정도가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잘 살고 잘 지내면 행복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 스스로 '잘'의 기준을 좀 낮춘다면 좀 더 쉽게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청년몰의 허름한 계단 벽에 정자체로 비스듬히 적혀있던 문구, '적당히 벌어 잘 살자' 는 나와 아내에게는 그러했었다.


 우리 가족의 소비는 우리가 조절할 수 있었고, 직장에서의 지나친 스트레스는 참아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필요한 소비만 하면 적당히 벌어도, 직장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며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직장이라는 곳은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당히 버는 것도 잘 사는 것도 남을 의식하는 것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는지 돌이켜 볼 만하다.



물론 쉽지않고 이루기 힘든 커다란 전제조건이 한가지 있다. 대출이 없는 온전한 우리집 한채는 갖는 것이다. 누군가는 욕할 것이다. '야, 그게 다야, 집 한채가 다라고!' '야! 온전한 내 집 한채만 있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싶어해!'



 그 집이 얼마만큼의 금전적 가치를 요구하는 집인지가 중요하다. 어디나 그렇듯, 집의 경제적가치는 지리적 요건이 중요하다. 만약 '대출이 없는 온전한 우리집 한채' 가 수도권의 최소 5억~10억의 아파트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적당히'와는 매우 거리가 있다. 나의 직장생활로 5억을 모은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부동산투자로 인한 벌이는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양평 중에서 변두리 시골에 6년 전에 집을 지었다. 땅값, 건축비 포함 3억이 안되는 금액으로 집을 지었다. 3억이 안되는 금액이었음에도 적지 않은 대출을 받았었다. 순자산은 훨씬 적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6년 후인 올해, 우리는 대출을 모두 갚았고 '결이고운가'는 대출이 없는 온전한 우리 집이 되었다. 올해로 나는 마흔다섯살이 되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아내는 선발주자고 나는 후발주자다. 


 아내의 선택과 취향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쏘서' 이다. 커피잔 받침대를 말하는 것인데, 이걸 쏘서라고 부르는지도 아내를 통해 처음 알았다. 우리집은 커피를 자주 마시는데, 드립을 한다. 필터에 커피가루를 담고 물을 졸졸졸 흘려 커피를 적시면 커피 본연의 향이 고소하고 달콤하게 주변을 적신다. 책을 읽던 결군도 킁킁거리며 향을 즐긴다. 두번째로 물을 좀 더 많이 좔좔좔 흘려 흥건하게 적시면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약간 쓴 향이 베어나온다. 탄 냄새인가. 잘은 모르겠다. 



아내는 짙게 내려진 커피를 쏘서위에 올린 잔에 쪼르륵 따른다. 

굳이.... 라는 생각이었다. 


쏘서말이다. 


커다란 머그컵에 한번에 따라서 마시면 되지, 굳이, 왜, 쏘서 위 작은 잔에 여러번 마실까.



 얼마전부터 아내가 '커피 한잔 마시자' 라고 청을 하면 나는 쏘서 두개와 그에 맞는 커피잔 두개를 꺼내 식탁위에 올린다. 쏘서위의 커피잔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쏘서위에 잔을 올려놓을 때 들려오는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좋다. 작은 잔을 받쳐주는 쏘서로 인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가치있어지는 기분이다. 분위기 좋은 파스타집에서 나오는 스프가 훨씬 커다란 접시에 받쳐서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없이 혼자 있을때도 쏘서를 사용하는 일이 흔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작은 것들에서 좋은 것들을 찾는 아내는 선발주자이고 그를 따르는 나는 후발주자이다.



어쩌면 아내는 진작부터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서 섬세한 행복을 느끼며 

'적당히 벌어 잘 살기' 의 '잘 살기' 를 실천하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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