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념품으로 지도를 그렸다고?
이번에는 시티컵 안 사? 남편이 묻는다.
글쎄 … 이번엔 별로 안 사고 싶네… 웬일이야 기념품으로 항상 스타벅스 시티컵을 사던 사람이..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필요 없을 것 같아. 나만의 특별한 기념품이 생겼거든!
첫 해외출장으로 라스베이거스를 갔었을 때 명품이나 쇼핑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동료들과 아웃렛 방문 일정을 잡는 대신 호텔 주변 쇼핑몰 기념품샾을 저녁마다 들락거렸다. 직업을 가진 뒤 20대 나의 가장 큰 사치는 해외여행이었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인형을 현지에서 구해와 오래도록 지켜보는 것이 사치의 여운을 즐기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물론 여행을 다녀온 다음 달 카드값 명세서만큼 강렬한 사치의 여운은 없지만 … 예쁘고 독특한 인형을 사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지금이라도 예쁘게 포장해 본다. 문제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내 맘에 드는 인형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크기는 20센티를 넘으면 안 되면서 보관이 용이해야 하고, 디자인은 독특하면서도 , 그 나라의 전통이 묻어나야 하는 인형 … 그런 인형을 찾기 위해 쇼핑몰을 들락거린 지 이틀이 지나도 마음에 쏙 드는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오늘 오후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해지고 체크아웃을 하자마자 주변 구경은 접어두고 또 쇼핑몰로 향했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 3시간 …. 정말 이제는 포기해야겠다 했을 때 저 구석에 서 있는 작고 파란 철로 만든 인디언 인형을 발견했다. 그렇지! 이거다!
공항으로 이동하며 마음에 쏙 드는 인형을 샀다는 기쁨과 함께, 기념품을 사기 위해 3일 동안 관광과 체험을 포기한 나란 사람에 대한 현타가 찾아왔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현지에서 일부러 인형을 찾아 헤매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다, 큰 노력 없이 구할 수 있는 스타벅스 시티컵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어느 도시를 가든 중심지에 스타벅스가 있었고 시티컵은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머그컵을 사다가 그 크기도 부담스러워 에스프레소 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편은 항상 내가 국내외 여행지에서 스타벅스를 들리길래 처음엔 스타벅스 커피가 아니면 안 마시는 고집 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처음엔 즐겁지만 모으다 보니 결국 큰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반에 있는 컵들을 보며 저렇게 쌓아두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스타벅스 에스프레소잔은 입 크기가 딱 맞는 아이들 전용 물컵이 되었다.
집 앞에서 조금씩 뛰기 시작한 지 4년,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여행지에서 달린 추억을 영상이나 러닝지도로 남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 국내외 여행을 몇 번 갔었지만 여행지에서도 달릴 만큼 나의 체력이 좋은 상황은 아니었고, 매번 운동화를 신을 때마다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런린이었기에 ‘다음 여행에서는 꼭 뛰어야지!‘ 하는 결심만을 남기고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고 올해에 체력이 좋아졌느냐? 그럴 리가…. 올핸 유독 마음이 고단한 일들이 많아 술도 많이 마셨고, 무기력에 빠진 봄을 보냈기에 체력이 좋은 상태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와 덜컥 등록한 첫 트레일러닝 대회가 9월 말에 예정되어 있었기에 셀프 강제 훈련이 6월부터 시작되었고, 7~8월에는 러닝 마일리지를 쌓아 체력을 한껏 끌어올려줘야 했기에 긴 18일간의 여행동안 러닝을 쉴 수는 없었다. 스페인 더울 텐데 어떻게 달리지? 아… 몰라 그냥 무조건 뛰고 보자. 트레일러닝 대회 나가는 거 주변에 소문을 다 내놨는데 이번엔 무조건 완주해야 해!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나만의 러닝지도들이 만들어졌다. 짐을 싸다 보니 기능성 소재의 러닝복장이 대부분이었고 러닝화, 모자와 고글, 스포츠 이어폰, 러닝워치와 전용 충전기도 캐리어에 넣었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주변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갓 구운 빵과 커피를 양손에 들고 와서 가족들을 깨워야지! 야~ 얼마나 낭만적인 모습인가! 이런 상상을 하고 스페인에 갔는데 웬걸 … 첫날 새벽 6시 주변은 깜깜했고 낯선 곳에서 어두운 길을 달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거리가 안전한지 쳐다보느라 테라스만 들락거린 지 1시간 20분이 지나서야 날이 조금씩 밝아왔고 가족들은 눈을 떴고 그렇게 오전 관광을 나가게 되었다. 그날 오후의 해는 너무 뜨거웠고 해가 조금 수그러든 시간은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러닝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 총 18일 중, 가족들의 휴식 시간을 활용해 짧게라도 뛴 날이 14일이니 나는 시간을 쪼개어서 최선을 다해 달렸노라!
여유가 있는 날은 오전 7시에 나가 유명관광지를 혼자 뛰고 그 앞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돌아오기도 했고, 바쁜 날은 낮시간 가족들이 시에스타를 즐길 때 장바구니 하나 챙겨 3킬로 정도 떨어진 한국마트로 달려가 간단한 식재료를 사 왔고, 말라가 같이 오래 머물며 거리가 익숙해진 동네에서는 저녁식사 후 안전한 해변길을 따라 러닝을 했다.
스페인에서 뛰는 동안 많은 러너들을 만났다. 그들은 러닝에 집중하기보다 주변을 구경하며 여유 있게 달리며 마주치는 러너들에게 ‘Hola!’를 외쳤다. 처음엔 스페인에서 내가 뛰다니!라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는데, 어느 순간 길에서 만나는 러너들과의 인사가 즐거워지며 그 순간만큼은 여행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 머문 현지인이 된 거 같은 착각에 빠졌다. 며칠이 지나자 나도 ‘Hola!’를 외치는 러너가 되었다.
새벽 인적이 드문 낯선 길을 혼자 나서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날은 밝았지만 아직 인적이 없는 고딕지구의 거미줄 같이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뛰어갈 때 나의 발자국 소리에 집중을 하다 어쩌다 사람의 인적이 느껴지면 목뒤가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지만, 골목을 나와 텅 비어있는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한 순간 나만 알고 있는 대성당을 만난 것 같은 짜릿함에 온몸이 전율한다. 여행을 다녀온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지만 러닝 지도를 꺼내어 볼 때마다, 건물에 드리우는 가느다란 햇살, 온도와 바람, 하늘의 색과 구름, 새소리와 나의 발자국 소리,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갓 구운 빵 냄새까지, 혼자 달리는 동안 오롯이 집중한 그 순간들이 영상처럼 내 머리를 지나간다.
그라나다에서 산니콜라스 전망대는 알함브라를 잘 볼 수 있고 석양으로 유명해서 전날 저녁 그곳에 방문했을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밀리다가 5분 만에 도망치듯 빠져나왔었는데, 다음날 아침 달려서 그곳에 도착해 보니 채 열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둘 떨어져 도시와 알함브라 궁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라나다를 내 눈에 담고 왔다. 알바이신 골목골목 바닥을 이루는 돌멩이도, 벽의 색깔도, 집집마다 그려진 석류 그림의 문패도 창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아침식사 향기와 함께 기억이 난다.
사람이 많은 낮시간에는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혼자일 때는 도전하기 어려운 골목골목을 들어가 보고 어제와 다른 길을 찾아서 달리며 새로운 카페와 가족들과 함께 가고 싶은 맛집을 발견한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새로운 장소를 발견할 때마다 그 도시를 하나 더 알게 된 기쁨을 추가할 수 있으니 모든 러닝이 즐거웠다.
물론 나는 스페인의 강한 햇살아래 달리고 수영을 하느라 햇볕알레르기를 처음으로 앓게 되며 엄청난 가려움과 열감과 통증을 겪었으나, 그 덕분에 스페인 약국을 여러 번 들락거리며 여러 명의 약사와 상담하는 경험도 하였으니 이 추억도 즐거운 기억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즐거운데 딱 한 사람 남편에게 미안한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매번 도시 이동을 위해 체크아웃 전 아침에, 다시는 이 도시를 못 볼 수도 있으니 달리며 기억하고 오겠다고 튀어나갔다. 그렇게 내가 달리며 나만의 추억을 쌓고 오는 사이 …. 남편은 짐을 싸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우고 체크아웃 준비를 혼자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곤 했다. 그래도 내가 돌아오고 샤워를 하면 내 흥을 꺾지 않기 위해 커피를 내려주며 테라스에 가서 마시고 오라고 하는 여유를 보여준 남편덕에 나는 14개의 러닝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남편 땡큐!